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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10월 14일

평양시간


제 22 회

제 2 장

길은 많아도

12


이튿날 아침 민영태는 부랴부랴 자전거에 올라 읍으로 향했다. 경영위원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였다.

언제나 인상좋던 그의 얼굴은 별안간에 썩은 콩 씹은 상이 되여버렸다. 웃는 모양을 타고났다던 초생달눈이 지금은 잔뜩 꼬부린 갈구리처럼 보였다.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견딜수 없었다. 되지도 않을 일을 맡겨놓고 강다짐으로 내모는 관리위원장이 섭섭하기짝이 없었다. 아들이 가긍하고 애처로울수록 그를 그렇게 만든 준석이에 대한 불만이 꾸역꾸역 커만 가는 영태였다.

어제 아침 시운전때도 함구무언하고 아들곁을 떠났던것인데 관리위원장이 아들을 또 부추겨 군에까지 보내고 결국은 소득없이 은천까지 갔다오게 만들지 않았는가? 어제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려 속을 태우다 자정이 되여서 초친 나물처럼 후줄근해 들어오는 그를 보고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온밤 잠을 이룰수 없어 재털이가 넘쳐나도록 담배하고만 해보았다.

하긴 모든게 내 불찰이지. 공연히 아들녀석을 끌어다놓고 고생을 사서 시키고있으니…

그렇다고 후회하고 한탄만 하고있을 때가 아니였다. 팔짱끼고 강건너 불보듯 할 일이 따로 있는것이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정말로 큰 랑패다. 금혁이가 하는 고생따위는 오히려 둘째문제고 한해농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모내기가 문제이다. 이젠 직화로의 실패는 기정사실인즉 빨리 수습책을 세워 기름을 끌어와야지 그러다 모내기가 지연되고 그로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면 직화로를 맡았던 금혁이나 자재보장을 맡은 부위원장이나 그 막중한 책임을 어떻게 진단 말인가.

아들도 살리고 나도 살자면 무조건 휘발유를 해결해와야 한다. 그것이 또한 준석이도 살리고 농장을 살리는 유일무이한 방도이기도 하다.

영태는 자전거를 몰아가면서도 이제 경영위원장한테 가서 어떻게 말할것인가 골똘히 생각을 굴리였다.

그가 경영위원회 정문에 들어서니 공교롭게도 금방 회의를 시작했다는것이였다.

담배를 피워물고 정문앞을 서성거리느라니 불현듯 농업위원회 정문앞에서 이렇게 담배를 피우며 준석을 기다리던 그때의 일이 밟혀왔다.

생각할수록 쓰거웁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다. 준석이가 해결해주겠다던 기름대신 내려와 관리위원장이 되여가지고 이렇게 자기를 곤경에 빠뜨릴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자기와 아버지의 인연을 보아서라도 준석이 어쩌면 그럴수 있단 말인가. 다름아닌 준석이때문에 농장을 위해 온갖 고생을 달게 여기며 뛰여다닌 자기 민영태의 체면과 위신이 깎일대로 깎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속이 후들거리군 한다.

이제는 김대일경영위원장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당면한 모내기를 보장하자고 해도 그렇고 금혁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바싹 달라붙어야 한다, 참, 이렇게 맨손으로 멍청히 기다리는게 아니지.

민영태는 잠시 생각을 굴려보다가 주머니를 만져보고 자전거를 돌려세웠다.

돈이 되는대로 이것저것 사넣은 그는 유유히 대일위원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안주인이 그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영태가 자전거바구니에서 묵직한 구럭지를 꺼내놓자 안주인은 대뜸 나무랐다.

《아유, 부위원장동진 들어올 때마다 매번 이렇게 들고오셔요? 솔직히 우리 혁이 아버진 이런걸 달가와 안하신답니다. 받아놓으면 제가 욕을 봐야 해요.》

《뭐 달가와하구 요구해서 가져오나요? 사람이 인사도덕이라는게 있으니 그렇지요. 받기 싫어도 받는게 도덕이니까 받는거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글쎄… 가져온걸 도루 돌려보낸다는것도…》

녀인은 얼굴에 난색을 지었다.

《아, 그렇지 않구요? 성의를 무시당하는것만큼 모욕이 있나요? 자, 어서 들여다 끓일건 끓이구 하시오. 난 아무래도 위원장동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으니까.》

영태는 일부러 스스럼없는 태도를 취하며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고 어깨를 젖히였다.

《예, 그럼 텔레비죤이나 보시면서 좀 쉬세요.》

녀인은 텔레비죤수상기에 전원을 넣고 나갔다.

거기에서 울려나오는 서정가요의 선률이 애틋하게 가슴을 적시였다.

한참만에 담배생각이 나서 주머니를 뒤지던 그는 어느덧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버렸다.

(헌데 경영위원장이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가? 하긴 내 부탁이 아니라 고향의 부탁이지. 대일인 워낙 이름처럼 통이 크고 씨원씨원하고 또 인정도 많은 호남아이니 쪼물짝하게 굴진 않을거야. 한 댓톤쯤 뽑아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그는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영태는 전화종소리에 눈을 떴다. 부엌에서 음식냄새가 구수하게 풍겼다. 안주인이 들어와 전화를 받았다.

《예, 저예요. 회의가 끝났어요? 오늘 점심은 어디 다른데 가시지 말구 집으로 꼭 와주세요.… 손님이 와서 그래요.… 선봉리 부위원장동지… 예? 리에 나가야 한다구요? 야, 그럼 어쩌나? 꼭 만나야 한다는데… 예, 알겠어요.》

영태는 정신이 번쩍 들어 상반신을 일으켰다.

《위원장동지가 어디 나가신답디까?》

《예, 부위원장동지가 기다린다니까 잠간 집에 들렸다 나가시겠대요.》

영태는 안도의 숨이 후― 나갔다. 품놓고 마주앉지 못하는건 아쉬운 일이지만 하마트면 허탕치고 돌아갈번 하지 않았는가.

좀 있으려니 정말 대일위원장이 집에 들어왔다.

호걸스러운 풍채에 성격도 대틀인 그는 직급의 차이를 초월하여 허물없이 물었다.

《왜? 무슨 일로 왔나?》

직판대기물음에 직판대기로 대답하는것이 제격이다.

《이거 야단났수다. 모내기가 코앞에 닥쳤는데 기름이 있어야지요?》

《으응? 선봉리는 잡관목으로 대용연료를 만든다더니, 부위원장동무가 도에서 아들까지 데려다 시작하지 않았소?》

《챠, 이래노니, 내 그럼 시간가더래두 실정얘길 좀 해야겠수다.》

영태는 선봉리에서 직화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자초지종 두루마리로 이야기하였다.

심중해서 끝까지 듣고난 대일이 머리를 끄덕이며 혼자소리로 말했다.

《글쎄 나도 꽤 되겠는가 하고 미타하게 생각했더니 그렇게 됐구만. 하긴 우리 농기계작업소나 다른 군에서도 못했는데 그렇게 쉽게야 되겠나?》

《어찌겠소? 나나 내 아들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준석이가 관리위원장으로 와서 첫해농사인데 어떻게든 잘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나도 그 생각이네. 기름이 얼마 안 들어와서 힘들긴 한데 가능한껏 짜내보기요. 원래 농장마다 기름을 얼마간씩 주게끔 돼있지만 선봉리는 여유를 봐서 좀 푼푼히 주겠소.》

《여유를 봐서라구요? 그럼 여유가 없으면 안된다는 소리 아니요?》

《허허… 사람두 참,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겠군.》

《그러지 말구 약속해주시우. 아, 믿구 찾아왔다가 빈손 메구 가란 말이요?》

영태는 가슴이 널뛰듯 하면서도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였다.

영태는 끝내 휘발유 몇톤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야말았다.

대일은 이렇게 뒤를 박았다.

《인정때문이라기보다 다른데보다 앞장서라고 더 주는거요. 그런줄 알구 일을 본때있게 내밀라구 하오.》

《예, 이거 정말 고맙시다.》

영태는 감지덕지해서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영태는 식사를 하고 가라는 대일의 청을 마다하고 나는듯이 귀로에 올랐다.

민영태를 바래주고 돌아서던 대일은 부엌 한구석에 댕그랗게 놓인 배부른 비닐구럭지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보, 이건 뭐요?》

안해의 눈길이 죄지은 사람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글쎄 안된다는데 막무가내로 그러니, 여보, 이걸 뒤집 영남이네 집에 가져다주면 어떨가요?》

뒤집 영남이네 집이라면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넷이나 되는 집이다.

《그게 좋겠소,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걸 받지 마오.》

대일은 무슨 말인가 더 할듯 하다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


민영태가 개선장군마냥 희색이 만면해서 집에 들어선것은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이제 오세요? 식사 어떻게 됐어요?》

나가서 걸치고 들어올 때가 드문한지라 안해가 이렇게 물었다. 어디가 또 아픈지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나앉는 자세가 편안치 않아보인다.

《먹긴 어디서 먹고 와? 빨리 들여오라구.》

《에그, 쯧쯧… 어디 가서 식사 한끼도 못 얻어잡숫고 오는 주제에 큰소리는?》

미옥은 괜히 약을 올려주느라고 이렇게 시까슬렀다. 그는 남편이 나가서 식사하고 오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직업이 그래서 나가다니는 률이 많다나니 집에 오붓이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때가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였다.

《아유, 허리야. 뙤약볕에 온 나절 김을 맸더니 죽겠구나, 정말…》

미옥은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한바탕 엄살을 부리고나서야 끙하고 일어났다.

《원, 엉덩판이 함지만 해가지구 밤낮 죽는 소리야? 저 관리위원장아주머닐 좀 보오. 처음 하는 농사일이지만 얼마나 이악스레 하나?》

《됐어요. 남의 떡은 다 커보인다더니…》

미옥은 밥상을 차려가지고 들어오며 그제사 생각난듯 물었다.

《참,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경영위원장동지를 만나봤어요?》

《만나보지 않구? 가만, 그런데 금혁인 벌써 나갔나?》

《벌써가 뭐예요? 아직 들어오지두 않았어요.》

《아, 그럼 작업장에 가봐야 할게 아니요?》

영태는 들었던 수저를 도로 놓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아유, 깜짝이야, 소리는 왜 쳐요?》

《소리 안치게 됐소? 녀석이 그만큼 고생하구두 무슨 미련이 있어서 아직두 거기 붙어있는가 말이요?》

그 말에 미옥은 찍소리 못하고 한숨만 내쉬였다.

《아무래두 안되겠어. 그 맹물같은게 주대없이… 내 좀 나가보구 오겠어.》

집을 나선 영태는 씨근덕거리며 기계화반으로 갔다.

제관작업장에서 울려나오는 용접기소리와 펑끗거리는 섬광이 더욱더 부아를 돋구었다.

열려진 문으로 들어서던 그는 무춤 굳어졌다.

뜻밖에도 관리위원장이 금혁이와 함께 설계도면을 펴놓고 작업을 하고있었다. 옆에는 점심보자기가 기다리고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밥을 먹으려는 모양이다.

젠장, 한쪽에선 휘발유를 끌어오느라 뛰여다니는데 한쪽에선 밥까지 싸가지고 나와 되지도 않을 일을 붙잡고있구나.

영태는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있다가 《어험.》기침소리를 냈다.

망치질을 하던 준석이 땀밴 얼굴을 들더니 반색을 했다.

《아, 마침 오시는군요. 오늘 집사람이 후방사업을 해왔길래 금혁일 붙잡아놨지요. 이제 곧 식사를 하자던 참입니다.》

《참 답답하우다. 아, 되지도 않을 일에 왜 또 붙어서 주접스레 그러우?》

《되지도 않을 일이라니요? 설계를 개작해서 하는건데…》

《됐시다. 좌우간 이제는 이런 고생을 안해도 되니 다 거두시우.

금혁이, 넌 어머니가 기다리는데 빨리 가거라.》

《아니, 왜 이럽니까? 여기 밥을 갖다놨는데.》

준석은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따지듯 물었다.

《다르게 생각지 마오. 우리 금혁인 더운 국이 없인 밥을 못 먹는 아이가 돼서… 또 저 애 어머니가 밥을 안 먹구 기다리고있소.》

아버지의 거동에서 무엇인가 눈치챈 금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제야 영태는 준석의 팔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사실 단둘이 얘기할게 있어 그랬소.》

《뭔데요?》

《휘발유가 해결됐소.》

《예? 그게 정말입니까?》

준석의 얼굴에는 기쁨과 의혹이 엇갈리였다.

《아, 정말 아니구.》

《어떻게… 해결됐다는겁니까?》

《걱정마우. 공식적으로 받아오는거니까.》

영태는 믿기 힘들어하는 준석에게 경영위원장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준석의 얼굴에서는 한가닥 의혹마저 사라지고 괴로움이 그늘을 지었다. 수척한 두볼과 푹 꺼진 눈확, 부르튼 입술.

《그러니 다른 농장들에 골고루 나가야 할 기름을 우리에게 돌린단 말입니까? 그건 안될 말입니다.》

준석은 힘없이 뇌이며 고개를 저었다.

영태는 아연실색하여 떡 굳어졌다. 준석의 말을 곱씹어 음미해보기까지 했다. 그다음엔 급급히 설복하기 시작했다.

《아니, 주겠다는 기름을 안 받겠다는건 또 무슨 소리요? 어떡허든 농사를 잘 지어놓구봐야 할게 아닌가? 군에서도 다 깊이 생각해서 보장해주는건데 그걸 마다할 필요가 뭔가 말이요? 되지도 않을 대용연료 믿구 멍청해있다가 모내기를 제때에 못해서 농사를 망치게 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소? 책임은 책임이고 농사군이 낟알을 못내면 머리를 들고 살수가 있소?》

준석은 흠칫하고 두눈섭을 떨더니 고개를 비틀었다. 괴로움을 묵새기느라 가슴이 세차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잠시후에는 다시 결연히 눈길을 쳐들었다.

《물론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제 농장 농사만 생각하면서 기름이나 비료를 더 받아다가 농사를 잘 지어선 뭘합니까. 다른 농장들의 농사가 그만큼 피해를 보게 된다는것은 너무도 명백하지 않습니까. 결국 나라사정은 안중에 없이 제 낯내기나 하자는 소리가 아니고 뭡니까?》

《뭐라구? 제 낯내기?》

영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얄팍한 입술을 떨었다. 그러나 용케 자신을 다잡았다. 아직은 감정을 폭발시킬 때가 아니다.

그는 년장자의 체면을 지켜 너그럽게 타일렀다.

《위원장동문 너무 문제를 외곬으로 몰고가는게 탈이요. 고지식한 성미에 그럴수 있다고 리해는 하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우. 한개 농장의 농사문제가 어떻게 원칙 하나로만 될수 있소? 더더구나 지금처럼 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때에.》

《그래서 더더욱 진심으로, 량심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거지요.

두말할것없이 당에서 하라는대로 대용연료도입을 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더 론하지 맙시다, 부위원장동무.》

준석의 말은 그대로 날카로운 비수가 되여 영태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영태는 그만 리성을 잃고 소리쳤다.

《론하지 말자구? 그렇게 강압적으로 내몬다고 일이 되는가? 누구는 뭐 하자구 안해서 실패하구 포기한줄 아오? 전문적으로 농기계를 제작하는 기업소들에서도 해결 못한걸 농장수리분조가 어떻게 한다는거요? 어떻게? 엉?》

《남들이 못한다고 우리도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준석의 어조는 놀랄만큼 태연하고 침착하였다.

그것이 더더욱 영태의 울분을 촉발시켰다.

《너무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놀지 말라구. 제 말만 제일이라구 남의 말은 다 무시하는가? 난 그래두 윤기아바이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구, 또 자네 체면을 생각해서 애가 타서 이리 뛰구 저리 뛰구 했어. 그런데 그 심정을 알아주기는커녕 낯내기라구?

어디 남들의 진정을 다 뿌리치구 혼자 독단으루 농사를 지어보게, 지어보란 말이야! 어험…》

할말을 다한 영태는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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