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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10월 14일

평양시간


제 37 회


4


이튿날 첫새벽에 일어난 리순은 수향을 찾아 진거름달구지를 끌고 읍으로 떠났다.

어뜩새벽에 떠났으나 느린 황소걸음이다보니 읍에서 진거름을 실었을 때는 벌써 날이 활짝 밝은 뒤였다.

달구지를 몰고 선봉리로 돌아오던 그들은 옥수천다리목에서 금혁이와 마주쳤다.

격자직반소매샤쯔를 입고 한쪽 어깨에 멜가방끈을 걸친 그는 본래의 그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안겨왔다. 안경속의 두눈은 더욱 날카로와지고 창백한 두볼은 대리석으로 깎아다듬은듯 여위고 싸늘해보였다.

엊저녁에 집에 왔다가 누구도 못 보게 새벽출근을 한다는것이 공교롭게 수향이네와 마주친것이다. 더구나 수향의 머리엔 자기가 준 빨간 수건이 변함없이 씌여져있는것이 아닌가.

그걸 보는 첫 순간엔 어쩔수없이 당황하고 놀랐으나 이내 랭정한 리성에로 되돌아갔다.

사나이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란도질하다못해 공공연히 배반한 처녀를 용서할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랭담하게 했던것이다. 그런 처녀에게 더이상 미련을 가진다는건 사나이이기를 그만둔다는것을 의미했다.

수향이도 경멸에 찬 눈빛으로 쏘아보고는 홱 고개를 틀어버렸다.

조마조마해서 둘사이를 번갈아보던 리순은 의외로 쌀쌀한 찬바람이 오가는것을 느끼자 안타깝게 수향의 손목을 잡았다.

《수향이, 금혁동물 만나고 와. 응?》

수향은 대답대신 《이랴!》하고 소잔등에 채찍을 얹었다.

성난 주인의 채찍질에 놀라난 황소가 껑충걸음으로 저만치 달아났다.

할수없이 리순이가 떨어져 금혁을 붙잡아세웠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싶었으나 금혁은 이미 땅땅한 얼음벽이 되여버렸다.

그의 입에서는 랭기가 풍겨났다.

《이걸 놓으라요. 난 바빠서 빨리 가야 해요.》

《어떻게 된거야? 금혁이, 제발 수향일 오해하지 말어.》

《됐어요, 리순아주머니. 우리 사인 모든게 끝난 뒤예요. 난 더 말할것도 없어요.》

《그럼 처녀의 얼어붙은 심장 하나 녹여주지 못하는건 사나이로서 옳은 행동인가? 처녀를 배반하구 고향도 버리구 금혁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가 말이야.》

순간 금혁의 안경알이 번쩍 빛을 뿜었다.

《내가 처녀를 배반했다구요? 리순아주머닌 그렇게 생각해요? 수향이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그래서 이 민금혁일 그런 너절한 배신자로 락인했다는거예요?》

《진정해요, 금혁동무. 동무들사이엔 무슨 오해가 생긴게 틀림없어요.》

《아주머닌 너무도 몰라요. 하긴…》

격분해서 씨근거리던 금혁은 별안간 얄팍한 입술에 랭소를 떠올렸다.

《그렇게들 생각하라죠. 나도 처녀한테 채우구 달아났다는 말은 듣고싶지 않으니까요. 내가 그를 배반했지요. 그를 배반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났단 말입니다. 이젠 됐어요?》

《?!》

금혁은 리성을 잃은듯 조소에 찬 말을 마구 내뿜고나서 성큼성큼 돌아서 가버렸다.

리순은 방망이에 뒤통수를 맞은듯 머리속이 텅 울림을 느끼며 망연자실하여 서있었다.

금혁이가 이렇게 변하다니? 그 마음 곱고 참하던 청년이 어쩌면 이렇게 모질어지고 이지러질수 있었을가?

한편 수향이도 설음과 고민을 묵새기느라 입술을 깨물며 짓수굿하고 걷기만 했다.

고향을 버린 주제에 신사차림을 하고 읍거리를 돌아치는 꼴이 참을수 없게 역스러웠다.

부위원장이 벌써 읍내에서 며느리감을 물색한다는 소문이 들려온 때여서 혐오감이 더욱 컸다.

생각할수록 입이 쓰거워났다.

사실 얼마전 리순이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그 밤 수향은 금혁의 앞으로 자기를 자책하는 편지를 썼었다. 그 무엇으로써도 지워버릴수 없는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추억, 자기의 옹졸한 감정때문에 죄를 지은데 대한 후회, 사나이의 너그런 아량으로 부디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부탁 그리고 사랑이란 어떤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견해…

그 모든것을 성의껏 적어넣느라고 그는 온밤을 꼬박 새웠었다. 두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여 아침을 맞았으나 그의 마음은 기쁘기만 했었다. 하루밤사이에 자기자신이 몰라보게 성장했다는 흐뭇한 생각에 절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엄혹한 겨울밤을 이겨내고 새날의 려명을 맞는 환희로운 감정에 스스로 잠겨보며…

이제 편지를 주면 그걸 받을 때 금혁의 표정과 거동이 어떠할가? 그것을 그려보느라니 장난스러운 처녀의 심정은 하루종일 흥겹고 간질거렸다.

편지를 전해줄 기회를 찾느라 저녁퇴근시간까지 기다리다 찾아가니 금혁은 이미 군으로 들어갔다지 않는가!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

설마 그럴수가 있으랴!

다음순간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자 머리가 핑 돌았다. 딛고 선 땅이 통채로 흔들리는것 같았다.

한가닥 미련마저 허물어져버린 수향의 가슴에는 서리서리 원한과 분노만이 쌓였다.…

오늘 만나서까지 랭기를 풍기는 그를 보고나니 속히우고 배반당한 수치심이 극도에 이르렀다. 어느새 솟구쳐나온 눈물이 앞을 가리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전에 웅― 소리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도 황막한 안개바다를 홀로 헤매이는 심정이였다.

하여 그는 멀리 앞에서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뜨락또르가 코앞에 닥치도록 미처 피할념을 못하였다.

뜨락또르가 급정거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황소란 놈이 기겁을 하여 피한다고 하는것이 길옆의 도랑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바람에 수향이도 달구지와 함께 아찔하게 나딩굴었다.

뜨락또르운전수가 사색이 되여 뛰여내렸다.

다름아닌 리호영이였다.

《아니, 수향아!》

그는 허겁지겁 달구지바퀴밑에 깔린 수향에게로 달려내려갔다. 달구지를 밀어내고 수향을 안아일으키는 호영의 손이 풍을 만난듯 부들부들 떨었다.

처녀는 달구지채에 맞아 정신을 잃고있었다. 상한 이마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무작정 그를 부축하여안고 개울쪽으로 가는데 멀리서 마주오던 리순이 그 모양을 띄여보고 황급히 달려왔다.

《아니, 얘! 수향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리순은 울먹해서 소리치며 수향을 흔들다가 호영을 향해 말했다.

《빨리 병원에 실어가야겠어요.》

《그… 그럽시다.》

리호영은 한절반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리순이 수향의 웃옷을 벗겨 개울물에 헹구려다보니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편지봉투가 짚이였다.

겉봉을 보니 금혁이에게 쓴 편지였다.

리순은 편지를 자기 몸에 간수하고 수향을 뜨락또르에로 옮겨갔다.

《달구지는 제가 수습해가지고 갈테니 운전수동문 수향일 맡아주세요.》

《알겠소.》

호영은 수향을 운전석에 싣고 군병원을 향해 속력을 놓았다.

구급실에서 의사와 간호원이 달라붙어 강심제를 주사하고 산소호흡을 시켰다.

수향은 정신을 차렸으나 타박이 심하여 전문과의 입원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절망에 빠진 리호영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침상에 굳어져있었다.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떨리였다.

사실 그는 오늘의 사고가 전적으로 자기의 불찰로 빚어진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뜨락또르를 타기 전에 그는 안해와 다투고 화김에 술을 마시였던것이다. 운전수가 술을 마셨다는 그자체가 실수를 전제로 한것이므로 절대로 용서될수 없으리라는것은 뻔했다. 사실을 고백하고 스스로 처벌을 요구하는것이 옳은 처사이며 그게 차라리 괴로움을 더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영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밖으로 나왔다. 뜨락또르가 아직 발동이 죽지 않은채 퉁탕거리고있었다. 그는 작업반을 꾸리는데 필요한 모래를 싣기 위해 옥수천으로 나오던 길이였다.

이미 파놓았던 모래를 싣고 들어와 작업반마당에 부려놓은 그는 지체없이 리당으로 갔다.

리당비서는 없고 부비서가 일을 보고있었다.

리호영은 부비서에게 자기가 저지른 사고에 대하여 처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리순이 먼저 도착하여 알렸기때문에 부비서도 이미 사고가 난것을 알고있었다. 수향의 어머니 오봉연에게 말하여 병원에 가보도록 조치를 취한 뒤였다.

《그래, 어떻게 돼서 그런 사고가 일어나게 됐습니까?》

《내가 죽일 놈입니다. 내 이제 모든걸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리호영은 자기 가정내부문제여서 이때껏 숨겨왔던 일들을 자초지종 이야기하였다.

《…사실 집사람이 리에서 내세워주구 떠받들어주는 초급일군이길래 될수록 소리를 내지 말자구 참아왔지요. 그런데 오늘 새벽에는 내가 그만 동네 부끄럽게 소란을 피우면서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키고말았습니다. 그리고는 화김에 술을 마시구 타지 말아야 할 뜨락또르를 타구… 그렇게 됐습니다.》

부비서는 사업수첩에 호영이 하는 말을 기록해놓고있었다.

《내가 이렇게 자기비판을 하는것은 용서를 바라서가 아닙니다. 용서를 받을수 없는 막중한 죄라는걸 압니다. 가정불화를 일으키구 작업시간에 술마시구 또 사고까지 저질러놨으니 어떻게 용서를 바라겠습니까?

낯가죽이 쇠판대기가 아니구서야… 그저 당조직의 처분을 바랄뿐입니다.》

진땀을 흘리며 힘겹게 말을 번지던 호영은 《후―》한숨과 함께 깊숙이 고개를 떨구었다.

부비서는 심중한 낯색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알겠습니다. 리당위원회에 반영하고 합의를 보아야겠으니 래일 아침에 다시 오십시오.》

《예.》

당위원회를 나서는 호영은 어쩐지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듯 개운한 마음이였다.

그날 저녁 총화시간에 이 모든 자료들을 보고받은 박정운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가 전화로 준석을 찾았다.

잠시후 김준석이 방에 들어서자 《이걸 좀 보오.》하고 자료를 넘겨주었다.

자료를 읽어나가는 준석의 얼굴은 컴컴하게 질려갔다. 그를 놀라게 한것은 사고 그 자체가 아니였다. 점심때 리순을 통해서 사고직전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수향이가 금혁이와의 관계때문에 고민하다가 부주의한것이라고만 판단했었다.

여기에 뜨락또르운전수의 가정문제까지 엉켜들줄이야… 영순반장의 남편에게 그런 고민이 있었단 말인가? 이 모든게 사실이라면 박영순이에게 문제가 있지 않는가?

《호영동무 문제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참만에 준석이 물었다.

《어떻게 할게 있소? 본인이 스스로 잘못을 알구 허심하게 비판하는데 용서해야지. 물론 사고는 쳤지만 피해자가 내 딸이니 다른게 없을것 같구만. 인명피해를 낸것도 아니니 법적처벌을 받을 일은 아닌거구. 내가 관리위원장을 오라구 한건 호영이네 가정문제때문이요.》

《…》

준석은 머리가 숙어졌다. 자기 딸에게 생긴 불행은 뒤전에 밀어놓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당비서였다.

《내가 당비서로서 일을 쓰게 못하다나니 그 가정에 불화가 생긴줄은 모르고있었소.》

《제가 일만 일이라구 내몰면서 가정생활의 화음을 맞추는 문제에까지 관심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영순인 제 동생인데 제가 집에도 자주 들려보지 못했지요.》

두 일군은 서로 자신에게서 책임을 찾으며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였다.

《우리 다같이 교훈을 찾기요. 가정내부문제가 혁명과업수행에 어떤 후과를 미치는가를 똑똑히 알구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감정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립시다.》

《알겠습니다.》

준석은 당위원회를 나오는 걸음으로 곧장 호영의 집을 찾아갔다.

이밤따라 일찌기 잠자리에 들었는지 대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충격적인 사고를 계기로 일시 가정안의 《폭풍》이 가라앉은 모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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