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주체108(2019)년 9월 18일

평양시간


제 53 회

제 5 장

순정의 열매

10


흥분의 밤은 더디게 흘러갔다.

정춘화는 벌써 몇번째 전지불을 켜보았다.

11시… 12시… 1시…

그때마다 네활개를 펴고 드렁드렁 코를 고는 남편의 모습을 야속하게 지켜보았다. 어쩌면 이리도 태평스러울수 있담? 이제 날이 밝으면 올해의 첫 벼베기전투가 시작된다는걸 감감 잊어버린게 아닐가?

불과 몇시간전인 어제 밤 선전실에서 열렸던 작업반총화연단에 올라 옥수천개답틀을 맡은 분조장으로서 토론까지 한 남편이였다.

천평! 종전의 기준으로는 엄청난 목표앞에 춘화는 은근히 불안감마저 느꼈었다. 그것도 조건이 제일 불리한 자기 분조가 리적인 시범단위로 나서야 하는것이다.

그래 회의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남편에게 조심히 물었었다.

《이봐요, 정말 하루에… 천평을… 벨수 있을가요?》

《걱정두 원, 일단 결심하면 무조건 하는거야.》

워낙 입이 무거운 남편의 대답은 짤막하고도 모가 났다.

한창세와 정춘화는 작년가을에 결혼한 후 혁신자내외로 소문을 크게 냈다.

생활도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재미나게 꾸려나갔다. 집안팎 꾸밈새는 물론 새로 만든 마당의 꽃밭이나 물탕크도 알뜰하기 이를데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혀를 차게 했다. 규모있게 담장을 치고 둘레로 과일나무도 여러 그루 심어 키웠다.

올봄에 금옥이가 농업대학에 입학한데 이어 대덕산초소에서 군사복무를 하는 쌍둥이형제가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찍은 기념사진을 보내와 이 집에는 경사에 경사가 겹치였다.

한창세는 겉보기에 뚝하고 과묵하면서도 웅심깊고 다정다감하여 안해를 뜨겁게 사랑해주었다.

춘화도 그런 남편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고 위해주었다.

창세가 분조장이 되면서부터 춘화에게는 걱정거리가 또 하나 생겼으니 그것은 남편이 분조관리에서 빈틈이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만큼 그의 어깨는 무거워졌고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분조일에 앞장서야겠다는 자각이 더욱 커갔다.

분조앞에 어려운 전투임무가 박두한 이때 어떻게 마음편히 잠들수 있으랴.

사실 힘겨운 전투를 치르려면 잠을 충분히 자야 할텐데 긴장과 흥분때문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이제라도, 다문 한시간이라도 잠들어보았으면…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기라도 한듯 남편이 불쑥 돌아누우며 억센 팔로 그를 끌어당겨안았다.

금시에 몸과 마음이 포근해지면서 달콤하게 잠이 오기 시작했다.

피뜩 (이러다 늦잠이라도 자면?) 하는 위구심이 들어 또다시 정신이 새록새록 맑아졌다.

군적으로 소문난 1등작업반에 시집온 이래 새 분조원들과 벼베기경쟁에서 승부를 겨루어보기는 처음인 그였다. 사실 벼베기작업이야말로 매사람의 속도순위가 뚜렷이 구별지어지는 마라손경기와도 같은 치렬한 전투인것이다. 단단히 잡도리를 하지 않으면 우습게 망꼬리가 될 우려가있었다.

어제 밤 회의끝에 박영순반장이 슬그머니 그를 불러 하는 말이 《춘화동무, 래일 전투에서 동무가 기둥선수가 돼야겠어요. 그러자면 누구보다 먼저 나가 선줄을 잡는게 중요해요.》하고 오금을 박기까지 했던것이다.

춘화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한채 2시가 되자 자리를 일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나간 그는 물을 끓여 닭을 튀해놓고 쌀을 한가마되게 안쳤다. 하루종일 먹을 밥과 함께 돼지, 개먹이도 끓여놓아야 했다.

어미돼지의 새끼나이예정일도 며칠 안 남았으니 돼지먹이에도 어지간히 신경을 써야 하는것이다.

불을 다 때고 칼도마에 마늘다짐을 하는데 소재지쪽에서 방송차의 음악소리가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편이 웃옷을 입으며 나왔다.

《빨리 밥해야지. 불은 내가 때겠소.》

춘화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어서 세면이나 하세요. 밥은 다 했으니.》

《뭐? 벌써?》

창세는 눈이 둥그래서 부엌안을 둘러보더니 달고 구수한 고기냄새를 그제야 맡았는지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하, 이거 미안한데? 혼자 수고하는줄 모르구 잠만 잤으니…》

《당신이야 잠만 들면 자루속에 넣어 지고가도 모르는걸 뭐.》

춘화가 세면물을 떠놓으며 곱게 눈을 흘기자 창세는 《허허…》하고 뒤더수기를 긁었다.

잠시후 그들은 톱톱하니 맞상을 하고 서로 권하며 밥을 먹었다.

《자, 이젠 빨리 나가자구.》

창세가 엊저녁에 갈아두었던 낫 두가락을 숫돌과 함께 새끼중태에 집어넣으며 재촉했다.

《잠간 기다려요. 돼지도 〈식사〉를 시켜야지요?》

바께쯔에 김이 문문 나는 뜨물을 가득 퍼담고 쌀겨를 버무려넣으면서 춘화가 말했다.

창세는 시뭇이 웃으며 써레기담배를 말았다.

안해가 인민군대후방가족으로서 돼지기르기에서도 리적으로 단연 1등 하겠다고 아글타글하다나니 자연히 돼지를 우대하는 말버릇이 붙은것이였다.

창세가 토방에 앉아 담배를 몇모금째 빨고있는데 별안간 돼지우리쪽에서 새된 웨침소리가 울려왔다.

《아니, 저 금옥이 아버지! 야단났어요. 이걸 어찌나?》

《엉? 무슨 일이요?》

창세가 급히 일어나 달려가보니 송아지만 한 어미돼지가 두툼하게 깔아준 북데기바닥에 벌떡 드러누워 씩씩거리는데 이따금 무엇에 놀란듯 푸들쩍 몸을 떠는것이였다.

그옆에서 춘화는 울상이 되여 어쩔바를 모르고있었다.

《돼지가 갑자기 왜 이럴가?》

창세는 우리속에 들어가 돼지의 귀쪽 뒤부위부터 만져보았으나 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만삭이 된 배를 어루만져주자 돼지는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소화불량이 왔나?》

《제 생각엔 아무래도… 예정일이 앞당겨진것 같애요.》

《뭐? 그럼?…》

두사람은 동시에 굳어진채 마주보았다.

(그럼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소?)

(그럼 천평베기는 어떻게 하구요?)

미처 입을 열지 못하는 그들사이엔 이런 속대사가 오고갔다.

이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영순반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분조장동무, 아직 안 나갔어요?》

춘화가 허겁지겁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유, 반장이 마침이구만. 집에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겼어.…》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순은 불을 맞은듯 깜짝 놀라 되물었다.

《글쎄 그놈의 돼지가 예정일을 앞당겨 오늘 새끼낳이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

《아니, 좀더 참았다 낳으라면 안돼요?》

《그렇게야 어떻게? 벌써 막 나오려구 하는것 같던데 도로 들여보낼수도 없구…》

《에이 참… 시집가는 날 발탈이 난다더니.》

영순은 제가 한 말이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어 허구픈 웃음을 짓고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해결책을 내놓았다.

《좋아요. 이렇게 하자요. 내 이제 동네할머니 한명을 여기로 보내겠으니 동무들은 지체말고 빨리 나가 선줄을 잡으세요. 선두기둥선수가 늦잡으면 그만큼 분조전반이 늦어지게 돼요.》

《동네할머니를?》

춘화는 미처 말뜻을 리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전투기간 마을에 남아서 집집마다 짐승먹이를 주게 돼있는 할머니예요. 책임성이 높은 할머니이니 걱정말구 빨리 움직이라요. 오늘 전투일정은 분초를 쪼개 일해도 긴장해요.》

영순의 불같은 독촉에 떠밀린듯 한창세와 정춘화는 급급히 집을 나섰다.

낫가락같은 달이 서켠 하늘에 걸려 희푸름한 빛을 던져주고있었다. 아직은 인적이 느껴지지 않고 집집의 굴뚝에서 연기만 피여올랐다.

두사람은 뛰다싶이 걸음을 다그쳐 어느덧 옥수천동뚝밑의 논길에 이르렀다.

벌써 솨락솨락 벼베는 소리가 울려왔다.

춘화는 아연해서 굳어졌다.

(내가 한발 늦었구나. 어떤 이악쟁이길래 한밤중에 나왔을가?)

서너길 베여나간 논뚝옆의 첫이랑을 살펴보았으나 어둠속에 사람이 보일리 없었다.

그쪽에 가보고 온 남편이 두번째 이랑에 들어서며 일렀다.

《내가 먼저 나갈테니 뒤따라오라구.》

《싫어요. 제가 먼저 나가겠어요.》

춘화는 어마지두 놀라는 남편에게 나직이 속심을 비쳤다.

《저 이악쟁이와 한번 겨루어보고싶어 그래요.》

《허, 당신이 꽤 저 사람을 따라잡을수 있을가?》

《어떤 사람이게 그래요? 처녀예요, 아주머니예요?》

《처녀든 아주머니든 어디 따라가보우. 아무래도 나한테 자리를 내놓게 될텐데…》

《그래요? 어디 보자요.》

결국 앞으로, 뒤로 만만치 않은 《적수》들에게 둘러싸인셈이다.

춘화는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질쩍거리는 논판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솜씨를 보란듯이 단꺼번에 서너줄 휘잡아 힘있게 낫을 후려쳤다.

순간 차거운 이슬이 화라락 들씌워지면서 온몸이 으쓸해났다.

주춤했던 그는 반충하듯 무섭게 낫질을 다그쳐나갔다.

죽기내기로 기운을 써서 그런지 얼마쯤 지나자 손에서 자개바람이 일고 목에서는 겨불내가 났다.

이마로, 턱밑으로 흐르는 땀을 미처 씻을새도 없었다. 눈섭에 연신 매달리는 땀방울을 떨어뜨리느라 눈을 꼭 감았다떴다 하면서도 일손을 떼지 않았다.

천평이면 이만한 길이의 이랑을 여섯줄은 베야 한다.

솨락, 솨락, 쏴락.

논판 여기저기서 벼대 넘어가는 소리들이 귀맛좋게 울린다. 다른 사람들이 나온걸 보아 한시간쯤 지난것 같다. 점점 팔힘이 진하고 숨이 가빠왔다. 벌써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지 뜨끔거리는 아픔이 마쳐왔다.

어느덧 한구간을 다 베고났을 때는 날이 활짝 밝은 뒤였다.

춘화는 허리끈에 매달린 수건으로 얼굴을 씻고나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정확히 1시간 30분만이다. 이 속도면 여섯구간을 벨수 있다는 자신심이 생겼다.

새벽노을이 붉게 비껴간 벼바다를 누비며 20여명의 분조원들이 층층계단을 지어 나오고있었다. 바싹 뒤따라나오는 남편, 그뒤로 박영순반장, 명준이, 유미옥이…

춘화는 앞서 끝낸 이악쟁이가 누구였을가 하고 벌써 저쪽 끝에서 새줄을 잡은 그 사람을 향해 다우쳐갔다.

무겁게 일렁이는 벼이삭의 물결우에 농립모가 언뜻 나타났다. 녀자가 아니라 남자였구나. 누굴가?

총총히 그옆으로 다가가던 그는 못박힌듯 서버렸다.

《어마나, 관리위원장동지가?!》

농립모밑으로 땀이 줄을 지어 흐르는 준석의 얼굴이 웃고있었다.

《제일먼저 뒤따라오는게 누군가 했더니 춘화동무였구만, 속도가 여간아닌데?》

《아이, 관리위원장동지두 벼베기를 하십니까?》

《그럼, 내가 천평베기를 발기했는데 응당 해야지.》

《그렇지만… 위원장동지야 언제 이런 일을 해보았다구 농장원들과 꼭같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남보다 일찍 나와 시작한건데 계속 앞자리를 고수한다는게 헐치 않은걸? 자, 어디 나를 따라잡아보라구.》

준석은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대여섯줄의 벼밑둥에 낫을 후려대고있었다.

춘화는 슬그머니 승벽이 살아올라 재빠르게 옆줄을 잡아 따라나갔다. 얼마후에는 끝내 자리바꿈을 하고야말았다.

당황해서 쩔쩔 매며 뒤따르는 관리위원장을 보니 춘화는 왜서인지 마음이 즐거워지고 신바람이 났다.

두번째 이랑은 두시간만에 끝났다. 이런 식으로 속도가 점점 떠진다면?…

세번째 이랑을 시작할 때에는 극한점에 이른것처럼 몹시 힘이 들었다. 농사군의 1년농사일중에 제일 힘든 작업이라고 하는 벼베기는 그저 마라손과도 엄연히 다르다. 팔, 다리는 물론 배와 허리, 엉뎅이, 머리와 목에 이르기까지 오장륙부의 힘과 기능이 다같이 동반되여야 하는 온몸운동의 련속인것이다.

더우기 지난밤 한잠도 자지 못한 후과가 더는 참을수 없게 피로와 졸음을 몰아왔다. 머리가 무거워지고 눈시울이 자꾸만 내리감겼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싶었다. 허나 이제 쓰러지면 아득히 뒤떨어지고말것이다. 선두기둥선수로 내세워준 영순반장의 믿음을 저버릴수 없다.

그는 몇번이나 눈앞이 아찔해오며 그 질벅한 감탕판에 쓰러지는 환각을 느꼈다. 정신이 깜박깜박 흐려졌다.

그러다가 그만 낫을 빗치였다. 선뜻 하는 아픔에 정신을 차리고보니 손등으로 새빨간 선지피가 방울방울 배여나오고있었다.

정춘화는 낫을 놓고 상처를 감싸쥐였다. 가슴이 덜컹하였다. 상처의 아픔때문이 아니라 속도가 지연될것이 겁나서였다.

그는 얼른 손수건을 찢어 창상부위를 지혈시키고나서 다시 낫을 들었다.

《아니, 춘화동무! 손을 상한게 아니요?》

어느새 꼬리를 물고 따라나온 김준석이 놀라서 물었다.

《아닙니다.》

춘화가 당황해서 손을 감추었으나 준석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안되겠소. 구급치료를 받아야지.》

《구급치료라구요? 아니, 이까짓걸 가지구 한가하게…》

춘화가 펄쩍 뛰는데 준석은 큰소리로 불렀다.

《원장동무! 어디 있소?》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맨 뒤쪽에서 벼를 베나오던 원장이 일어나 대답했다.

《빨리 여기로 오시오. 외상환자가 생겼소!》

춘화는 놀랐다. 병원에서 여기까지 따라나와있은줄은 몰랐던것이다. 그는 꼼짝 못하고 현장치료대에 손을 내맡길수밖에 없었다.

처치를 받는 사이 관리위원장이 춘화의 자리를 메꾸어 끌고나갔다.

《조심할게지. 원, 쯧쯧…》

옆에서 벼를 베나오던 한창세가 걱정 절반, 책망 절반의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이였다.

춘화는 지혈제를 바르고 손에 붕대를 감기 바쁘게 낫을 찾아쥐였다. 할수없이 선두자리를 떼우고말았구나 했는데 준석이 자기가 베던 줄을 내여주며 말했다.

《자, 자기 위치를 인계받소. 나는 아무래도 춘화동무 뒤를 따르면서 일솜씨를 좀 배워야겠으니까.》

《관리위원장동지두 참…》

춘화는 가슴이 뭉클해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부상은 당했어도 선두위치를 고수하고싶어하는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본것 같았다.

마침 그때 방송차가 나타났다. 방송원의 격동적인 선동소리에 이어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의 흥겨운 선률이 온 벌판에 울려퍼진다.

사람들이 한바탕 기운들을 뽑고 지쳐갈 때에 떠들썩 들이대는 경제선동의 시작은 그야말로 정확히 계산된, 적절한 시간의 선택이였다.

쾌속적이며 률동적인 음악의 리듬에 낫질이 저절로 맞추어졌고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흥취가 힘겨움을 잊게 했다.

정춘화도 방금전까지 무겁게 매달리던 피로와 졸음이 언제 그랬더냐 싶게 씻은듯 사라져버리고 기운이 부쩍부쩍 솟아났다.

방송차를 타고온 로병들이 젊은이들같이 챙챙한 목소리로 《샘물터에서》와 《해안포병의 노래》와 《저격수의 노래》를 신바람나게 불러대더니 현장으로 왁 달려들어 분조원들이 나가는 줄을 마주 베여나왔다.

말그대로 일손들에 불이 이는듯 한데 한바탕 선동연설을 하고난 박정운당비서가 뚜껑을 씌운 바께쯔 두개를 물지게로 지고 땀을 철철 흘리며 논뚝길로 걸어왔다. 그뒤로 리합숙식모가 흰 보를 씌운 광주리를 이고 대뚝대뚝 따라왔다.

박정운은 일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김이 문문 나는 빵과 콩우유를 공급하였다.

이렇듯 들끓는 분위기속에서 세번째 이랑은 어느새인지 모르게 휘딱 끝내버렸다.

새 이랑을 잡아 절반쯤 나갔을 때 점심시간이 되였다. 해볕따스한 옥수천동뚝밑의 북신한 잔디밭에 당비서와 관리위원장으로부터 로병들과 분조원들, 방송원, 운전사, 합숙식모, 병원원장에 이르기까지 빙 둘러앉아 각기 싸가지고온 점심들을 펼쳐놓았다.

박정운이 올방자를 틀고앉아 음식차림새를 흐뭇하게 둘러보며 말했다.

《내 한생을 살아보니 말이야. 세상에 진수성찬이니, 산해진미니 해야 이렇게 차린 음식상만 한게 없더구만. 로동으로 흠뻑 땀을 흘리고 포전머리에서 다같이 먹는 음식맛이 얼마나 좋은가? 아, 이걸 어느 호부자집 잔치상에 대겠나 말이야.》

《정말 그렇습니다.》

김준석관리위원장이 의미있게 머리를 끄덕이자 여기저기서 《옳습니다.》, 《맞습니다.》하고 감동된 목소리들이 련발되였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조미료는 배고픔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저 배고픔이 아니라 땀흘린 뒤의 배고픔이지.》

《자, 그럼 어서 배불리 먹구 또 한바탕 땀흘려보자구!》

당비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달주모자》를 쓴 명준이가 떡을 저가락에 꿰여 기발처럼 흔들며 《어서 빨리 먹자!―》하고 웨치였다.

모두가 《와하하.》 폭소를 터뜨렸다. 녀인들은 서로 어깨를 쥐여박으며 죽겠다고 웃어댔다.

분조장 한창세가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주다말고 문뜩 놀라서 눈을 흡떴다.

《아니, 이거 이제 보니 반장동무가 안…》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당황한 눈길로 여기저기 휘둘러보았다.

정말 영순반장이 보이지 않았다. 분조원들모두가 의아해서 웅성거리는데 준석관리위원장이 그제야 생각난듯 《오 참, 작업반에 급한 일이 있다면서 갔는데, 아까 갔으니까 인차 올게요.》하고 안심을 시켰다.

아닌게아니라 얼마 안있어 박영순이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다. 빨갛게 상기된 둥실한 얼굴에 좁쌀알같은 땀방울이 자르르하게 덮여있었는데 무슨 기쁜 일이 있는지 볼우물이 옴폭 패이도록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야― 반장동지 기다릴래기 목젖 다 마르겠수다. 빨리 오시우.》

《아니,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 있길래 짬시간에 그렇게 뛰여다니오?》

《인상 보니 기분이 좋으신것 같은데 같이 기뻐합시다, 예?》

사람들의 지꿎은 성화에 영순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렴, 같이 기뻐해야 하구말구요. 동무들! 오늘 우리 1분조장동무네 돼지가 〈해산〉을 했는데 새끼를 열여섯마리나 낳았다는 희소식이예요.》

《히야!― 열여섯마리나?》

《그게 정말이요?》

놀라움과 탄성이 한꺼번에 터져올랐다.

《정말 아니구요. 암컷 열한마리에 수컷 다섯마리랍니다.》

《챠, 그놈 돼지 우량종은 우량종이다. 열여섯씩 어떻게 만들었노? 쯧쯧…》

《열여섯마리니까 우리 분조 열다섯세대에 신통히 한마리씩 다 돌아가겠는데요?》

《아니, 난 이미전부터 암수 한쌍 신청했는데 그렇게 되겠나?》

《리기주의 부릴 생각 말게. 한마리씩 골고루 노나가지는게 옳지, 안그런가? 흐흐…》

분조원들이 기쁨에 들떠 유쾌한 싱갱이질을 할 때 정춘화는 가슴이 찌르르해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입술을 깨물며 따끈해오는 눈을 슴벅이기만 했다. 당사자인 춘화자신도 일하는 정신에 감감 잊고있었던 돼지생각이였다.

《쌍둥이엄마가 쉴참마다 돼지풀을 극성스레 해들이더니 돼지도 그 정성을 알아주누만.》

《글쎄말이예요. 자기 주인이 천평베기에서 혁신하라구 해산예정일두 3일이나 앞당겨 낳질 않았나요?》

영순의 말에 모두가 다시한번 놀랐다.

《그러니 한동무네 분조는 천평베기뿐아니라 고기생산문제도 쭈욱 풀린셈이구만.》

준석의 말을 영순이 얼른 받았다.

《고기생산뿐인가요? 거름생산문제도 동시에 해결되지 않습니까?》

《오― 참, 그렇구만.》

《하, 거 한창세네 새 가정이 와짝 흥하더니 분조농사, 분조살림도 따라서 흥하는게 아니요?》

박정운당비서가 흡족해서 하는 말에 모두들 그렇다고 웃으며 떠들었다.

그러자 한창세는 버릇처럼 뒤더수기를 매만지며 시뭇이 웃는데 춘화는 춘화대로 부끄러워 얼굴을 남의 등뒤에 숨기고 어쩔줄 몰라한다. 생각할수록 그는 오늘의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공교롭다고 생각했던 돼지의 《해산》이 이런 큰 기쁨을 낳게 될줄을 어이 알았으랴.

하긴 그가 돼지사육의 모범이 되게 된것도 따지고보면 한창세와 새 가정을 이룬 덕이고 그것은 또 관리위원장이나 당비서, 반장의 덕인것이다. 가정일이 잘되니 분조일도 잘하게 되는것이 사실이였다.

춘화는 홀로 고독하게 살던 평범한 농장원인 자기를 혁신자로 내세워주려고 그리도 왼심써준 일군들을 생각해서라도 일을 더 잘해야겠다고 속다짐을 하였다. 그래 오후작업을 시작할 때는 허리띠를 한층 더 단단히 조여매고 달라붙었다.

새벽부터 하루종일 최대마력으로 질주해온 정춘화는 점점 몸이 말을 듣지 않는것을 느꼈다.

서산마루에 불타던 석양노을도 꺼져버린 후였다.

마지막줄을 시작해놓은채 날이 저물고말았으니 절로 탕개가 풀려나갔다. 분조원들모두가 너나없이 지칠대로 지친 모습들이였다.

그때 장쾌한 취주악곡을 울리며 달려온 방송차가 전조등빛을 환히 비쳐주었다. 오후에 로병들을 태우고 다른 작업반으로 떠나갔던 방송차가 다시 찾아온것이였다.

《층층 계단을 지어 벼나락을 눕혀나가는 대오의 선두에 여전히 기수되여 나아가는 정춘화동무! 기력은 진했어도 신심높이 나아가는 전투원동무들!

승리는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1분조전투원들이여!

최후승리를 향하여 앞으로!》

춘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던 천평이라는 봉우리의 정점이 금시 손에 잡힐듯 가까이 다가온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힘을 내자! 온 작업반, 온 농장이 너를 지켜본다. 장군님을 만나뵈온 대덕산초소의 아들들이 이 어머니의 소식을 받고 기뻐하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마음속으로 웨치고 부르짖으며 스스로 자신을 고무하고 채찍질하며 안깐힘을 다하여 한줄한줄 베여나갔다. 그의 몸에서 샘솟듯 흘러나오는 땀방울들이 수그린 얼굴을 통하여 후둑후둑 떨어져내린다.

드디여 절정에 이르렀다. 남은 힘을 깡그리 모아 마지막벼대를 베여눕히는 순간 정춘화는 그 자리에 벼대와 함께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땅속으로 녹아내리는듯 한 달콤한 피로, 땅이 통채로 둥둥 떠오르는것 같은 현훈증…

아, 여기서 그대로 잠들고싶구나.

그때 뒤를 바싹 따라나온 한창세가 안해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여보, 정신차리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소.》

춘화는 남편의 품에 몸을 실으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난 끝내 해냈어요. 천평을 제일먼저… 끝냈단 말이예요.》

《그렇지만 생각해보우. 분조가 다 끝내자면 아직 멀었는데 당신혼자 끝났다고 이렇게 나앉으면 어떻게 되겠소? 너도나도 자기몫만 하면 그만이라구 마지막사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옳겠소?》

춘화는 반쯤 감기던 눈시울을 불현듯 치켜올렸다. 그래, 금옥이 아버지말이 옳아. 나처럼 이렇게 자기 생각만 해가지구야 분조가 맡은 과제를 어떻게 할수 있담?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스스로도 놀라운 힘으로 일어났다.

《고맙소, 여보!》

창세는 안해의 손을 꾹 쥐여주며 속삭이였다.

《이제 당신뒤를 다른 사람들도 따라설거요. 끝나는 차례로 맨 마지막줄부터 거꾸로 잡아나가면 분조전체가 일시에 끝낼수 있게 되오.》

《알겠어요.》

춘화는 도저히 움직일수 없을것 같던 자기 몸이 무슨 힘으로 또다시 낫질을 시작할수 있었는지 알수 없었다.

방송차에서 어느새 알았는지 격정에 젖은 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오늘 전투의 첫 시작부터 분조의 기수가 되여 앞장에서 달려온 정춘화동무, 드디여 천평의 결승테프를 끊었으나 분조전체의 천평을 위하여 또다시 낫을 들었습니다. 그뒤를 따라 련이어 뒤떨어진 동무들을 도와나선 분조장 한창세, 작업반장 박영순동무들!

참으로 온 작업반, 온 분조가 한덩어리되여 올해농사를 빛나게 결속하기 위한 벼가을전투에서 집단적혁신을 일으켜나가는 그 모습 자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들의 뜨거운 마음에 받들려 낟알산은 높이높이 솟아오를것입니다.》

이어 장쾌한 혁명군가가 터져나왔다.

춘화는 가슴이 후더웠다. 힘든줄도 몰랐다.

그가 맨 마지막에서 나오던 명준이와 마주치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다른 조들도 속속 끝을 맺었다.

일을 끝낸 분조원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논머리잔디밭으로 나와 털썩털썩 앉았다. 너무 지쳐 집으로 갈 생각조차 잊은듯 했다. 하긴 이제 10리길을 걸어갈 일이 아뜩한것만은 사실이였다.

여기저기서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당황한것은 박영순이였다.

그는 망연한 눈길로 아득히 멀리에서 반짝거리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마치도 그 불빛들은 어서 오라고 정답게 부르며 기다리는 아이들과 어머니들의 눈빛같기도 했다.

문뜩 그 불빛들중의 하나가 이쪽으로 움직여오는것처럼 보였다. 환각이겠지 하고 눈을 다시 감았다뜨니 분명 류성처럼 불빛이 흘러오고있었다.

잠시후에야 영순은 그것이 자동차의 불빛이라는것을 알았다. 아르릉거리는 발동소리가 불빛과 함께 이쪽을 향해 가까와오고있었다. 옥수천다리를 지나 읍으로 가는 자동차인듯싶었다.

포전길어구에 이른 자동차가 박힌듯 멈춰서더니 그 누군가를 부르듯 빵빵 경적소리를 울리는것이였다.

동시에 방송차의 확성기에서 박정운당비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평베기를 성과적으로 끝낸 2작업반 1분조 전투원들에게 알립니다. 지금 동무들을 태워가려고 관리위원장동무가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다들 일어나 차에 올라주십시오!》

잠들었던 사람들이 일시에 깨여나며 《야― 관리위원장동지다!》하고 환성을 올리더니 와야― 하고 자동차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 관리위원장동지가?)

영순은 감사의 정을 느끼며 잠시 그자리에 서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불쑥 솟구쳐올랐다.

《반장동무, 빨리 가자구.》

정춘화가 영순의 팔을 잡아흔들었다.

《관리위원장동지!―》

입을 모아 웨치며 앞을 다투어 어푸러질듯 달려간 분조원들이 찧고 쫗고 웃으며 차에 쓸어올랐다. 자동차 앞머리에는 테프가 감기고 꽃송이들이 장식되여있었다.

운전칸옆에 서있던 준석관리위원장이 정춘화를 불러세웠다.

《춘화동무, 여기 운전칸에 타오.》

《예? 운전칸에야 관리위원장동지가…》

《아니요. 오늘 벼를 제일 많이 벤 혁신자를 운전칸에 모시고가기로 했소.

분조장! 동무가 명령해야지 내 말은 안 듣누만.》

춘화는 당황해서 곁에 선 남편을 돌아보았다.

싱긋 웃는 남편의 입에서 차돌같은 이가 달빛에 반짝이였다.

《타라구, 어서.》

더는 거절할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등을 떠밀리우다싶이 하여 운전칸의 푹신한 좌석에 몸을 묻은 춘화는 행복의 무아경에 휩싸였다.

김준석은 적재함에 올라 박영순과 나란히 앉았다.

《오늘 정말 수고했소. 그 아름찬 목표를 끝내 점령했구만.》

《다 관리위원장동지와 리당비서동지가 믿어주고 떠밀어주었기때문이지요.》

《아니, 그뿐이 아니지. 반장이 조직사업을 잘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였기때문에 기적이 일어난거요. 오늘같은 악조건에서도 천평을 돌파했으니 벼가을을 열흘동안 끝낼수 있는 확고한 전망이 열린 셈이요.》

《예, 이제부턴 정말 하루 천평 문제없어요! 그렇지요? 분조장동무.》

《결심하면 하는거지요.》

한창세가 히죽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자동차는 전조등을 환히 켜고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선창을 뗐는지 노래합창이 울렸다.


아리 아리랑

스리스리 스리랑

분조농사는 나의 농사

백가지 농사일 알뜰한 솜씨로

우리 분조 우리 살림 꽃을 피워가네


평범한 사람들이 기적의 창조자로 태여난 뜻깊은 이 하루를 길이 새기려는듯 노래소리는 하늘을 찌를듯 높이 그리고 끝없이 이어졌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도서련재
인생의 열매 제54회 인생의 열매 제53회 인생의 열매 제52회 인생의 열매 제51회 인생의 열매 제50회 인생의 열매 제49회 인생의 열매 제48회 인생의 열매 제47회 인생의 열매 제46회 인생의 열매 제45회 인생의 열매 제44회 인생의 열매 제43회 인생의 열매 제42회 인생의 열매 제41회 인생의 열매 제40회 인생의 열매 제39회 인생의 열매 제38회 인생의 열매 제37회 인생의 열매 제36회 인생의 열매 제35회 인생의 열매 제34회 인생의 열매 제33회 인생의 열매 제32회 인생의 열매 제31회 인생의 열매 제30회 인생의 열매 제29회 인생의 열매 제28회 인생의 열매 제27회 인생의 열매 제26회 인생의 열매 제25회 인생의 열매 제24회 인생의 열매 제23회 인생의 열매 제22회 인생의 열매 제21회 인생의 열매 제20회 인생의 열매 제19회 인생의 열매 제18회 인생의 열매 제17회 인생의 열매 제16회 인생의 열매 제15회 인생의 열매 제14회 인생의 열매 제13회 인생의 열매 제12회 인생의 열매 제11회 인생의 열매 제10회 인생의 열매 제9회 인생의 열매 제8회 인생의 열매 제7회 인생의 열매 제6회 인생의 열매 제5회 인생의 열매 제4회 인생의 열매 제3회 인생의 열매 제2회 인생의 열매 제1회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