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주체108(2019)년 9월 15일

평양시간



6. 총을 쥔 소년들

인민혁명군의 백두산지구 진출이 일으킨 여파가운데서 특기할만한 또하나의 사변은 청소년들속에서 일어난 참군열풍이였다. 압록강연안의 수림과 골짜기들에서 총소리가 한번씩 울릴 때마다 우리 밀영으로는 입대를 탄원하는 청년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입대지망자들이 늘어나는 과정에 재미나는 일도 많이 생기였다.

한번은 얼굴이 가마잡잡한 더벅머리소년이 물에 푹젖은 바지를 입고 우리한테 찾아와 형의 원쑤를 갚겠다고 하면서 부대에 받아달라고 떼를 썼다. 상풍덕마을에서 온 소년이였다. 소년은 자기 맏형이 거기서 청소년야학을 지도하다가 유격대에 밥을 해준것이 탄로되여 경찰놈들에게 학살되였고 둘째형은 보천보전투직전에 장군님부대에 입대하여 싸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도 혁명군을 찾아왔다는것이다. 입대를 탄원한 그 더벅머리소년의 이름은 전문섭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롱으로 마른 옷을 입고오는 청년들도 미처 다 입대시키지 못하는데 너처럼 젖은 옷을 입고온 장난꾸러기들이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고 하였다. 그러자 전문섭은 자기가 젖은 바지를 입고온건 어머니탓이라고 하면서 그 사연을 설명하였다.

전문섭이 상풍덕마을에 온 유격대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너는 아직 어려서 못간다고 잡아떼였다. 그리고는 아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바지를 물함지에 집어넣었다. 단벌바지가 물에 젖어 입을것이 없게 되면 아들이 유격대를 따라가지 못하리라고 타산했던것이다.

전문섭은 조바심이 났다. 그가 혁명군에 입대하는 문제는 소년회조직에서 이미 결정한것이였다.

혁명군에 입대할수만 있다면 벌거숭이가 되여서라도 백두산까지 한달음에 뛰여갈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던 전문섭은 어뜩새벽에 물함지에서 바지를 건져내여 대충 물기를 짠다음 그것을 걸치고 집을 떠나려 했다. 그제서야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격대입대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것은 압록강연안을 중심으로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와 서간도의 넓은 지역을 휩쓸고있던 참군운동이 어느 정도의 열도를 가지고 진행되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전문섭의 실례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이 운동에는 20대, 30대의 청년들뿐아니라 10대의 소년들도 참가하였다.

처음에 대렬보충사업을 맡아보던 지휘관들은 그런 소년들이 찾아오면 의논도 하지 않고 덮어놓고 집으로 돌려보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 부대의 병사, 지휘관들은 열네댓살밖에 안되는 소년들이 손에 총을 잡고 무장대오에서 싸울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김평조차도 그런 소년들이 오면 머리를 내흔들었다.

부대가 지양개등판에 머물러있던 1937년 여름 어느날 그는 총기장보다 더 작은 애숭이들이 한 20명 또 달려들어 입대를 시켜달라고 성화를 먹이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나의 결론을 요구하였다.

《좀더 큰 다음에 다시 오라고 암만 타일러도 말이 통해야지요. 나중엔 장군님까지 만나게 해달라고…장군님을 만나보기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씁니다.》

나는 소년들이 대기하고있다는곳에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을 진대나무에 앉히고 이름은 무엇이냐, 나이는 몇살이냐, 아버지는 무엇을 하느냐, 어느 동네에서 사느냐 하고 차례로 물어보았다. 내가 질문을 한가지씩 할 때마다 아이들은 고무공처럼 튕겨일어나서 묻는 말에 대답하군하였는데 그들의 행동거지에서 공통적인것은 어른티를 내느라고 몹시 애쓰는것이였다. 그들은 모두다 원쑤들의 《토벌》에 부모형제를 잃었거나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참살당하는 치떨리는 참변을 목격하고 그 복수를 위해 손에 총을 잡으려고 결심한 소년들이였다. 흉금을 터놓고 말을 나누어보니 속에 대감이 한둘씩은 다 들어앉아있었다.

세상이 험하면 아이들도 조숙한다는 말이 옳았다. 보이는것은 불행뿐이고 겪는것이 고생살이뿐이니 조선의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도 벌써 이 세상 내막을 환히 꿰들고있었다. 혁명은 비상한 힘과 속도로 사람을 격동시키고 각성시킨다. 혁명을 가리켜 새것을 낳는 학교라고 한 어느 명인의 말에는 사실 심오한 진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때 참군의 꿈을 안고 우리 숙영지로 찾아온 20여명의 소년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파란많은 우리 민족사의 한페지를 체현하고있던 가장 참혹한 수난자들이였다. 그 어린것들이 사회개조의 중임을 스스로 걸머지고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무장투쟁에 나서겠다고 절절하게 탄원해나설 때 나는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날 내가 만난 소년들속에는 리을설과 김익현도 있었고 김철만과 조명선도 있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그들이 다 조선인민군 차수로도 되고 대장이나 상장과 같은 장령들로 되였지만 그때만 해도 그들은 총대를 쥘만한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하는 검열대우에 서있던 애숭이들이였다.

이 소년들을 어떻게 할것인가?

물불을 모르는 어린 매들을 무슨 말로 어떻게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지 나로서는 대단히 난감하였다. 억대우같은 장정들도 힘에 부쳐서 부단한 훈련과 수양을 하지 않으면 락오자가 될수 있는것이 바로 혁명군생활이다.

나는 이런 말로 소년들을 달래였다.

…나는 너희들이 부모형제들의 피값을 받아내기 위해 손에 총을 잡으려고 결심한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애국심의 표현이다. 그런데 아직 나이들이 어려서 혁명군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것 같다. 유격대의 형님, 누나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아마 너희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것이다. 혁명군은 한겨울에도 산속에서 눈을 깔고 잠을 자야 한다. 며칠씩 비를 맞으며 행군할 때도 있다. 식량이 떨어지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우려먹든가 맹물로 끼니를 에우는것이 혁명군생활이다. 내 보기엔 너희들이 이런 고생을 견뎌내지 못할것 같은데 집에들 가있다가 좀더 큰 다음에 총을 메는게 어떠냐?…

그래도 소년들은 마이동풍이였다. 그들은 어떤 고생도 감당해낼 자신이 있다, 어른들이 눈우에서 자면 자기들도 눈우에서 잘수 있고 어른들이 전투를 할 때에는 자기들도 전투를 할수 있다고 하면서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그냥 졸라대였다.

나는 이때처럼 우리에게 군사학교가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통절하게 느껴본적이 없었다.

(이 사랑스러운 소년들을 모두 군사학교에 넣어 훈련도 시키고 몸도 단련시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독립군들도 한때 만주의 여러곳에 군사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사관학교들을 설립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만주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점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였다. 일제의 대군으로 뒤덮인 1930년대 후반기의 만주는 우리에게 독립군들처럼 군사학교를 세울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밀영에다가 양성소 같은것을 꾸려놓고 군사훈련을 줄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것도 실정에 부합되지 않았다. 왜놈들이 새로운 발화점을 찾아내여 중국땅에서 또하나의 9.18사변을 도발하리라는것은 세계의 모든 《청우계》들이 다 시사하고있는 문제였다. 우리는 여기에 대처하여 대기동전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런 때에 10대의 소년들을 무장대오에 받아들인다는것은 어려운 행군을 앞에 두고 배낭을 하나 더 지는것과 흡사한 일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불리한 점만 앞세우면서 그들을 덮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할수는 없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그 소년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들었다. 계급적각오만 보더라도 어른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굶을 때 자기들도 굶을수 있다고 한 소년들의 말에서 그날 나는 특별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말로만 애국을 하는 우국지사들이나 초로인생운운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혁명의 배신자들과 타락분자들에 비해볼 때 참군소망이 이루어지기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 소년들이야말로 얼마나 고결하고 열렬한 넋을 지닌 애국자들인가. 소년들이 어린 나이에 입대를 탄원해나선것은 사실 그 가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꽃다발을 안겨주어야 할 일이였다.

나는 이 투지만만한 소년들을 투사로 키우고싶었다. 당장 전투대오에는 세울수 없겠지만 방도만 잘 찾아내면 1∼2년사이에 끌끌한 후비군으로 키워낼수 있을것 같았다. 한해나 두해사이에 이 소년들이 모두 구대원들에게 짝지지 않는 전투원으로 자라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수확인가.

구대원들이 잠을 덜 자고 밥을 덜 먹는 한이 있더라도 강심을 먹고 애를 쓴다면 소년들을 짧은 기간에 날파람있는 싸움군들로 키워낼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소년들만으로 따로 중대를 조직하여 조건이 허락할 때에는 밀영에서 훈련을 주고 부대가 기동할 때에는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실전을 통하여 교육하고 단련시키자는 생각을 하였다. 이를테면 군사학교나 군정간부양성소의 사명을 동시에 감당하면서도 거기에 실천교육을 결합시키는 특수중대를 조직하자는것이였다. 나는 소년들을 부대에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그들에게 맹세문을 쓸 과업을 주었다. 너희들이 정말로 유격대에 입대하고싶다면 오늘밤중으로 맹세문을 다 써내라, 왜 혁명군에 들어와 총을 메려고 하는가, 입대한 다음에는 어떻게 살며 싸우겠는가 하는걸 글로 써내라, 그러면 그 글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김평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내 말을 듣고 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