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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20일

평양시간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1937년은 항일혁명의 전성기였다. 우리 주력부대의 백두산지구진출이 일으킨 파도를 타고 력사적인 전환의 시대에 들어선 조선민족해방투쟁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전례없는 폭과 심도를 가지고 앙양일로의 길을 걷고있었다.

만사가 우리의 의도와 의지대로 다 잘되여가던 그때 조선혁명은 사나운 도전에 부딪치였다. 우리가 백두산지구를 떠나 무송, 몽강현 일대에서 활동하는사이 적들이 세칭 《혜산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여 우리의 혁명력량에 대한 대대적인 폭압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던것이다. 적들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나온후 한해 남짓한 기간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우리의 령도와 로선에 충실한 혁명가들을 무데기로 잡아다가 처형하였다.

수차에 걸치는 검거선풍을 통하여 적들은 수백수천명의 애국자들을 잡아가두었다. 옥중에서 고문치사를 당한 사람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사건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내달리던 당조직건설사업과 조국광복회 조직건설사업은 심각한 손실을 당하였다.

나는 몽강현 대갑랍자밀영에서 김평과 김재수를 통하여 《혜산사건》에 대한 상보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때의 통분하던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수많은 억울한 희생을 낸 《민생단》소동이후 처음으로 체험해보는 커다란 상실감이였다.

나는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혜산사건》은 매개 사람들이 지니고있는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신념과 의지의 강도를 검증하는 일대 시련이였다고 할수 있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진짜혁명가와 가짜혁명가를 가르는 하나의 엄혹한 검열과정이였다.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절개를 지켜 원쑤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 반대로 신념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배신과 굴종의 길에 떨어졌다.

사건초기 고문에 못이겨 적들에게 대내의 비밀을 고스란히 섬겨바친 배신자들가운데는 길혜선과 백무선의 철도공사장들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지하공작원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철도공사장의 로동계급속에 혁명조직들을 박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을 몇개 맞고는 인차 적들에게 투항해버리고말았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고 혁명의 리익을 고수해야겠다는 철석같은 각오와 불굴의 투쟁정신이 부족하였다. 그 몇사람이 비밀을 불지 않았더라면 장백일대 혁명조직들은 건재하였을것이다. 우리는 벌써 1차 검거에서 권영벽, 리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지도핵심들과 조직성원들을 잃는 참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신념과 의지는 혁명가가 갖추어야 할 기초적자질이다. 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혁명가라고 말할수 없다.

참된 인간의 표징을 론할 때 우리는 그가 무슨 사상과 신념을 어떻게 지니고있는가에 대하여 응당하게 중시한다. 왜냐하면 사상과 신념이 강한 인간일수록 삶의 목표가 뚜렷하고 그 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노력에 성실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가들을 육성하는데서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적인 신념을 소유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였다. 우리가 신념을 혁명가의 중요한 표징으로 보고 그 배양에 막대한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는것은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기발밑에 진행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과정이 인류가 수행하는 모든 혁명가운데서 가장 간고하고 장기적인 변혁운동으로 되기때문이다. 강철같은 신념과 의지가 없이는 자연과 사회의 온갖 구속과 도전으로부터 인간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어려운 변혁운동을 끝까지 승리에로 이끌어나갈수 없다.

신념을 신념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강력한 동반자, 보호자가 바로 의지이다.

신념과 의지는 고정불변한것이 아니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더욱 굳건해질수도 있으며 약화될수도 있고 변질될수도 있는것이 신념과 의지이다.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에 변질이 생길 때 그 혁명은 헤아릴수 없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런 리유로 하여 우리는 신념교양을 공산주의적인간육성의 필수적인 공정으로 보고있는것이다.

신념과 의지의 련마는 혁명적인 조직생활과 실천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수 있으며 부단한 교양과 자체수양과정을 거쳐야 견고하고 확실한것으로 될수 있다. 이런 공정을 경과하지 않은 신념이나 의지는 사상루각과 같다. 혜산경찰서의 취조실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가 바로 그런것이였다. 그들은 혁명적인 조직생활과 실천과정을 거쳐 심신을 충분히 단련하지 못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사상의식은 폭풍속에서 련마되지 못한것이였다. 그들은 모두 항일혁명의 전성기에 입대하여 승리하는 싸움만을 체험한 사람들이였다. 혁명이 상승단계에 있을 때에는 그 흐름을 타고 이처럼 대렬내에 사상적으로 견실하지 못한 우연분자들이 끼여들게 된다.

《혜산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은 우리는 인차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비상회의를 열고 위기에 직면한 혁명조직들을 보호하고 당건설과 조국광복회 조직건설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1차 검거를 통하여 장백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가둔 적들은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건너 갑산일대에 검은 마수를 뻗치고있었다. 적들은 조선혁명의 명줄을 다 끊어놓기라도 할것처럼 그 무슨 실적을 뽐내면서 기세를 올리고있었지만 우리가 애써 건설해놓은 지하조직들이 다 망가진것은 아니였다. 장백과 갑산 일대에는 적들의 폭압망에서 벗어나 타고장에 피신했거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숨어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장백현당과 장백현 조국광복회 조직의 지도부는 권영벽, 리제순, 서응진, 박인진 등의 체포로 해체상태에 이르렀지만 박달, 김철억, 리룡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부는 그대로 살아움직이고있었다.

우리는 1차적으로 장증렬과 마동희를 국내에 파견하여 피신중에 있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성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통하여 조직들의 피해정형을 료해장악하며 파괴된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우리의 총적인 지향과 의도는 적들의 탄압으로부터 오는 손실을 최대한으로 막고 화를 복으로 바꾸자는것이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 성원들의 행방을 찾아 갑산군일대의 산간부락들을 차례로 훑어나가던 마동희와 장증렬은 남흥동에서 산농지도구 서기로 일하는 김태선이라는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김태선은 마동희의 동향친구였다. 그 두사람은 갑산땅에 와서도 청소년시절을 남다른 우정속에서 보냈다. 김태선이 장백현에 건너가서 무슨 강습소에 다니다가 학비난으로 학업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을 때 그에게 돈을 대준 사람이 다름아닌 마동희였다. 김태선이 강습소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처하게 되자 마동희는 서당돈을 5원이나 돌려 그가 공부를 계속 할수 있게 해주었다. 그후에도 그는 삯김을 매주고 번 돈과 땔나무를 팔아서 번 돈, 대서인노릇을 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모아 친구의 뒤받침을 직심스레 해주었다.

강습소를 졸업하고 산농지도구 서기의 자리에 취직하였을 때 김태선은 장길부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 내가 지식청년이 되여 밥술이나 얻어먹을수 있게 된것은 다 동희가 나를 진심으로 도와준 덕입니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내 한평생 동희의 우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동희가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부와의 련계를 지을 과업을 받고 갑산땅에 나갔을 때 남흥동의 김태선네 집을 피신처로 정한것은 이런 우정을 굳게 믿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그동안 적들의 충실한 노복으로 변해버린 김태선은 마동희와 장증렬이 자기 집에 나타나 숙식을 보장해달라고 하자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해주고는 김일성 부하 두사람이 자기 집에 와있다고 신고하였다. 그 김태선이라는자가 아주 고약한놈이였다.

마동희와 장증렬은 적들에게 체포된 때로부터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마동희가 어떻게 고문을 이겨냈고 어떤 방법으로 비밀을 지켜냈는가 하는것은 항일투사들의 회상기들과 문예작품들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였다고 생각한다. 마동희가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면 인민학교 아이들까지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혀를 끊은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사람이 자기 혀를 스스로 끊는다는것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각오는 살아서 역적으로 되는것보다 죽어서 충신이 되기를 바라는 참인간들만이 할수 있는것이다. 사람이 일단 죽음을 각오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다할수 있다.

마동희의 용기와 희생성은 신념이 강한데서 나온것이였다.

그 용기와 희생성은 어떤 고문이나 위협으로써도 거세할수 없는 무쇠같은 의지의 발현이였다. 마동희는 자기가 비밀을 지키면 조직은 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믿었다.

마동희를 신념이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것은 혁명실천이였다. 그는 백암지방에서 살 때 반일회도 조직해보았고 교편을 잡고 화전민의 자식들에게 애국주의교양도 해보았다. 인민혁명군에 입대한후에는 구대원들과 함께 간고한 무송원정도 해보고 경위중대의 학습강사로서 대원들의 정치, 문화적 자질을 높이기 위한 계몽사업도 해보았다. 그 과정에 사람이 망국노가 되면 상가집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며 민족이 살아나갈 길은 투쟁에 있다는것, 혁명을 해야 살길이 열리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자자손손 마소보다도 못한 노예살이를 하게 된다는것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이였고 그것을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었다.

마동희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신념의 소유자로 될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불공정한것, 몰렴치한것, 비량심적인것과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다. 상대가 너절한 인간이라는것을 간파하게 되면 담임교원과도 단호히 결별하였다.

소학교시절의 마동희의 담임교원 조가는 교육자의 량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시정배와 같은 인간이였다. 그는 학업성적을 실력에 따라 평가한것이 아니라 친, 불친을 가려가며 불공평하게 평가하였다. 뢰물을 많이 먹이는 집 아이들과 부자집 자식들, 권세가의 출신들에게는 실력에 관계없이 모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담임교원은 자기가 편애하는 학생들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우수생들의 점수를 깎아내리는것과 같은 비행도 서슴지 않았다. 마동희가 졸업반에서 공부할 때에도 조가는 그 버릇을 좀처럼 떼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뢰물을 듬뿍 찔러준 어느 권세가의 자식을 1등생으로 내세우기 위해 전과목 최우수생인 마동희의 력사시험성적을 일부러 《갑》이 아니라 《을》로 매겨버리였다. 교원의 처사에 불만을 느낀 마동희는 담임교원한테 서슴없이 찾아가 자기의 시험지를 보여줄것을 요구하였다. 조가는 시험지를 보여줄 대신 버르장머리없는놈이라고 하면서 그의 뺨을 후려갈기였다. 조가의 행위는 마동희의 분노를 격발시키였다. 그는 스스로 퇴학을 선언한 다음 담임교원앞에서 성적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동희의 아버지 마호룡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린 나이에 학교를 단념하고 생활전선에 뛰여드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낮에 장마당에서 사온 소학생모자를 아들에게 내보이며 네가 맨머리바람으로 다니는것이 민망스러워 방금전에 모자까지 사왔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냐, 훈장이 부자집자식편을 든다든가 권문세가의 눈치를 보는거야 다반사인데 그런다고 선생한테 시비를 걸면 어쩔셈이란 말이냐, 어서 담임선생을 찾아가서 사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동희는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가 담임선생을 찾아가는것까지 한사코 막아나섰다.

그후 마동희와 담임교원은 각기 적대되는 길을 걷게 되였다. 마동희가 시대의 반항아가 되여 애국전선에 떨쳐나섰다면 조가는 교단을 버리고 매국반역의 길에 나섰다. 그는 순사가 되였다가 나중에는 형사로 승진되여 애국자색출에 혈안이 되여 돌아갔다. 그가 눈을 곤두세우고 감시한 첫 대상이 바로 마동희였다. 조가는 마동희의 일거일동을 지꿎게 주시하였다. 똑똑한 건덕지가 없으면 사건을 날조해서라도 마동희를 형장으로 끌고갈 잡도리였다.

조가가 마동희를 본격적으로 미행하기 시작한것은 그가 장백땅에 들락날락하면서 인민혁명군의 물을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어느날 마동희는 장백에 건너가서 유격대대표인 김주현을 만나 입대승인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다가 압록강다리목에 도사리고있는 조형사와 맞다들었다. 조형사는 눈살이 꼿꼿해서 마동희를 노려보고있었다. 마동희는 다리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대번에 직감했으나 태연자약하게 집에 돌아가 출발준비를 하였다.

그날 마동희의 어머니는 백두산으로 떠나가는 아들에게 하직밥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마동희는 그 밥마저 먹지 못하고 총총히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가가 그를 잡아가려고 순사들과 함께 뜨락에 나타났던것이다. 마동희는 뒤문으로 집을 탈출하여 무사히 압록강을 건넜다.

스승이 제자를 잡으려고 돌아치는것과 같은 말세기적현상은 일제통치자들이 강요하는 반인륜적인 풍조가 빚어낸 비극이였다. 해방후 장길부녀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옛말처럼 들려주군하였다.

마동희는 구시산전투후 전투장근처에서 우리 부대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도망가는 조형사를 만났다. 그자는 마동희를 보자마자 무작정 총질부터 하였다. 마동희는 조국도 민족도 제자도 안중에 없는 이 후안무치한 친일반동을 즉석에서 처단해버리였다.

이 일화를 통하여 마동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