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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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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최후결전의 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전후에 쏘련을 방문하시였을 때였다. 크레믈리궁전에서 우리 수령님을 영접한 쏘련공산당의 책임일군은 그이께 자기 나라 간부들을 차례차례 소개해드리였다.

그 간부들속에는 당시의 쏘련국방상이였던 말리놉스끼원수도 있었다. 말리놉스끼는 자기 차례가 되자 웃는 얼굴로 《우리는 이미 구면이니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원동에 계시던 시절에 우리는 벌써 하바롭스크에서 첫 상봉을 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옳습니다. 우리는 오랜 전우입니다.》라고 하시며 그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시였다.

두 나라의 지도간부들은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김일성동지와 말리놉스끼의 인연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였는가. 하바롭스크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일본제국주의를 격멸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결전의 준비는 히틀러독일이 패망한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였습니다.

1945년 2월 얄따에서는 쏘, 미, 영 3개국 수뇌자들이 모여 비밀회합을 하였습니다. 1945년 2월이면 쏘련군이 웽그리아의 수도 부다뻬슈뜨를 해방했을 때이며 베를린에 대한 총공격전을 준비하던 때입니다. 독일의 패망은 시간문제로 되고있었습니다.

쏘, 미, 영 수뇌자들이 얄따에서 론의한 중심의제의 하나는 독일패망후 쏘련의 대일참전문제였습니다. 회의에서 쏘련은 독일 패망이후 2∼3개월이 지나 대일전쟁에 참가하기로 하였습니다.

얄따회담에서 쏘련의 대일참전문제가 확정된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동방피압박민족들과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고무로 되였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쳐나갔습니다.

쏘련군이 베를린해방작전을 시작한 때로부터 얼마쯤 지나서 원동전선군사령부는 우리에게 독일의 패망과 관련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국제련합군에 망라되여있던 쏘련군장병들은 그날 온밤 자지 않고 축하연을 벌리였습니다. 후방창고에 있던 술이란 술은 아마 그때 다 마셔버렸던것 같습니다. 군의소의 알콜도 하루밤사이에 결딴났습니다. 쏘련사람들이 원래 술을 많이 마시였습니다. 쏘련사람, 조선사람, 중국사람의 구별이 따로없이 모두가 전승의 기쁨에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우리는 쏘련의 승리를 우리모두의 승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딸리아의 패망이 독일의 패망으로 이어졌고 독일의 패망이 조만간에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였습니다. 독일의 패전은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전주곡이라고도 볼수 있었습니다.

한때 그렇게도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던 파쑈세력은 동서방을 무대로 하여 무덤에로 가는 이어달리기를 하는셈이였습니다. 이제 그 계주봉을 일본이 받아쥘 참이였습니다.

우리도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고 조국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대독전승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은후 련합군에 망라된 조선인 지휘성원들은 한데 모여 조국해방과 관련된 작전문제를 가지고 장시간 토론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소집한 회의는 아니였지만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고 엄숙했습니다. 모두가 격정에 넘쳐 일제격멸과 조국광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로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론의의 초점은 자력독립과 전민항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다는 확고한 주체적립장을 튼튼히 견지해야 한다,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적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고 국내의 항쟁조직들을 잘 준비시켜 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작전을 벌릴 때 그에 합세해서 전인민적인 항전을 벌려야 한다,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의 군사적련계를 강화하고 쏘련의 전반적대일작전과의 깊은 련관속에서 협동작전준비를 잘해나가야 한다는것이 그날 우리가 론의한 요점이였습니다.

그후 나는 쏘련과의 군사정치적협동문제를 두고 쏘련원동전선군 지휘부와 여러차례에 걸치는 협의를 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주보중이나 장수전과 함께 가기도 했고 어떤 때는 김책이나 최용건을 데리고 따로 가서 협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있을수 있는 일본의 침공에 대처하여 쏘련은 그동안 대일작전을 내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해왔습니다. 이런 준비는 독일패망 이전에도 했고 이후에도 하였습니다.

 

쏘련지도부는 독일과 힘겨운 전쟁을 하고있던 주체32(1943)년경에 총참모부의 원동담당부문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원동의 무력을 전시작전수행에 알맞게 개편하였다. 쓰딸린은 원동전선사령관과 집단군사령관들을 대독전쟁을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장령들로 교체하였다.

원동전선사령관 아빠나쎈꼬가 모스크바남방의 워로네쥬전선 부사령관으로 파견되여가고 그자리에 깔리닌전선 사령관이였던 뿌르까예브가 소환되여온것도 그런 조치의 일환이였다.

쓰딸린은 주체33(1944)년에 들어와 쏘련군이 쏘련경외의 동구라파땅에서 군사작전을 적극화하고있던 때에도 원동지역에 병력을 급속히 증파하여 그 군력을 최대한으로 늘여나갈데 대하여 명령하였다.

 

쏘련은 독일이 괴멸된후에 대일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작전방향과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쏘련군대와의 련합을 전제로 하는 계획이였습니다.

쏘련의 고위지휘성원들은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의 모든 부대들은 박두한 대일작전을 앞두고 종전보다 훈련강도를 몇배나 높이였습니다. 그때에 벌린 군사훈련은 국제련합군을 구성하고있는 매개 민족부대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그 모든 민족부대들이 다가올 대일련합작전에서 보조를 잘 맞출수 있도록 하는데 큰 관심을 돌리였습니다.

련합작전이 은을 내자면 국제련합군에서 민족부대별로 되는 작전분담은 어떻게 하고 각 군종, 병종간의 전투적 협동과 보조를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것이 중요했습니다. 국제련합군의 군사훈련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응당한 힘을 넣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각 부대들은 이와 함께 다년간의 항일전쟁에서 창조하고 련마해온 유격전법들을 완성하고 그것을 대규모정규작전에서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서도 꾸준하게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훈련을 다같이 내밀면서도 조국해방작전에 절실히 필요한 정찰훈련, 공병훈련, 무전훈련과 항공륙전대훈련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쏘련군대가 대독전쟁기간에 창조한 최신전쟁경험도 충분히 연구하고 익히였는데 그 수준이 대단했습니다.

국제련합군이 갓 조직되였을 때 훈련기지에 파견되여온 쏘련교관들은 대부분 지난날의 공민전쟁참가자들이였습니다. 그러나 대일작전을 최종적으로 준비하던 그무렵에는 쏘독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교관으로 와있었습니다. 몇해동안 현대전에서 단련된 사람들이니 교육내용도 매우 참신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국내항쟁조직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조국에 공작원들을 수많이 파견하였습니다. 백두산밀영과 간백산에도 우리 공작원들이 나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거기에 틀고앉아 항쟁조직들을 지도하고있던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최후결전준비를 다그쳐나갔습니다.

나도 그무렵 국내에 나와서 당면한 대일작전과 관련하여 국내에 있는 부대들의 활동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쏘련의 전반적대일작전준비와 우리의 작전계획을 일치시키기 위한 사업에 많은 시간을 바치였습니다.

쏘련은 1945년 여름에 와씰렙스끼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원동쏘련군총사령부를 조직하고 거기에 3개의 큰 전선군을 배속시켰습니다. 자바이깔전선군은 말리놉스끼가 담당했고 제1원동전선군은 메레쯔꼬브가 담당했으며 제2원동전선군은 본래 원동전선사령관이였던 뿌르까예브가 담당하였습니다.

제1원동전선군의 기본작전지역은 할빈이남의 중국동북 일부 지역과 조선이였고 제2원동전선군의 작전지역은 하바롭스크서쪽에 있는 동북지역이였습니다.

원래 국제련합군은 제2원동전선군에 배속되여 군사작전을 하게 되여있었으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주로 제1원동전선군과 련계를 가지였습니다. 원동쏘련군총사령부가 조직된 다음부터 나는 제1원동전선 사령관 메레쯔꼬브, 군사위원이였던 스띠꼬브와 거래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25집단군 사령관 치스쨔꼬브나 집단군지휘성원인 레베제브와도 친분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대일작전의 개시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조선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여있었습니다.

원동쏘련군총사령부의 소재지는 하바롭스크였습니다. 나는 하바롭스크에 드나들면서 와씰렙스끼와도 낯을 익히고 말리놉스끼와도 친교를 맺었습니다.

1945년 여름에 이르러 원동쏘련군총사령부는 련합작전을 위한 회의를 자주 소집하였습니다.

와씰렙스끼는 쏘련군총사령부의 작전적구상에 대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는 관동군주력을 포위하고 그것을 몇개로 고립분단하여 일거에 소멸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국해방과 관련해서는 종래의 작전적방침을 시종일관하게 견지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간백산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예정된 통로로 진출하여 각 도들을 해방하며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되여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평양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항공편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이미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들을 차지하고 전격적인 군사작전을 벌리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대대적으로 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 불러일으킴으로써 온 민족이 이르는곳마다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진격에 합세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 작전계획이 그 당시 우리 나라가 처한 군사정치정세하에서 조국의 해방을 단시일내에 이룩할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의 모든 도들에 락하산을 타고내린 빨찌산부대들이 왁왁 쓸어나와 전민항쟁부대들과 함께 사방에서 적들을 답새길판인데 무엇이 어려울것이 있었겠습니까.

해안선에 구축된 적의 요새지구로는 쏘련군이 폭격과 함포사격을 들이대면서 쓸어들고 국경쪽으로는 보병부대들이 기갑부대들을 앞세우고 해일처럼 밀려들판이였습니다. 쏘련사람들과 그렇게 약속이 다되여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최후결전을 앞두고 국내에 소부대들과 소조들을 많이 들여보냈습니다.

우리는 모든 빨찌산부대들과 인민무장대들, 항쟁조직들 앞에 적들을 완전격멸한후 식민지통치기관들을 청산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당과 인민정권기관들을 내올데 대한 임무도 설정하였습니다.

원동쏘련군 지휘성원들가운데서 내가 제일 많이 상종한 사람은 메레쯔꼬브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이마가 약간 벗어질사한 40대말기의 장령이였습니다.

메레쯔꼬브의 경력을 보면 쓰딸린이 그를 연해주방면의 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한것이 우연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원동의 한 부대에서 지휘성원으로 있은 메레쯔꼬브는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쏘련-핀란드전쟁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제7집단군도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쏘련군총참모장도 하였고 원동으로 오기전에는 모스크바서북부의 까렐리야전선사령관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메레쯔꼬브는 구면친구라도 만난것처럼 내 손을 꽉 잡아흔들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여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리를 권하고나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쟁에서는 조선동지들이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대일작전에서 조선동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에 큰 기대를 가지고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국제련합군에서의 조선지대의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료해한 다음 나에게 조선국내의 군사정치정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줄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 나라에서의 일본의 군사력량배치와 통치방법,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과 혁명조직들의 분포정형, 비밀근거지들과 련결되여있는 무장대들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대일작전을 앞둔 어느날 나는 련합군지휘관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향하였습니다. 쏘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가보니 메레쯔꼬브와 스띠꼬브를 비롯해서 대일작전과 관련되여있는 각 전선사령부의 책임일군들도 벌써 다 와있었습니다. 와씰렙스끼총사령관도 거기에서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우리의 항공륙전대전법에 기초한 조국해방작전계획에 대해서는 모두가 지지하였습니다. 그때 동북항일련군 부대들앞에는 만주지방의 주요도시들에 먼저 날아들어가 진격하는 쏘련지상부대들의 통로를 열어줄데 대한 임무가 부과되였습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쥬꼬브도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독일주둔 쏘련점령군 총사령관과 독일관리감독리사회 쏘련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쥬꼬브가 무슨 일로 거기에 왔댔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로서는 매우 인상깊은 상봉이였습니다. 이름난 백전로장인 쥬꼬브는 대단히 서글서글하고 소탈한 사람이였습니다.

쏘련사람들은 있는 성의를 다하여 우리를 접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외교적관례를 벗어난 특별한 환대였습니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레닌묘도 참관하고 력사박물관에도 가보았습니다. 모스크바방위와 관련되여있는 이름있는 전적지들도 구경하였으며 영화 《챠빠예브》도 다시 보았습니다.

대일작전과 관련한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쏘련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우리를 원동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배포유하게 계속 시내구경만 시키였습니다. 며칠후 그들은 우리를 쥬다노브에게로 안내하였습니다. 그 당시 쥬다노브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겸 비서의 직책을 맡고있었습니다.

쥬다노브에게 가보니 스띠꼬브가 이미 와있었습니다.

쥬다노브는 쓰딸린의 위임에 따라 동방에서 온 사절들을 만난다고 하면서 우리가 진행해온 항일무장투쟁을 격찬하였습니다. 그는 쓰딸린과 스띠꼬브를 통해 조선의 빨찌산 김일성 대한 말을 많이 들었는데 듣던바보다는 훨씬 더 젊어보이는것이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쓰딸린도 우리의 활동에 류다른 관심을 가지고있다는것이였습니다.

나와 쥬다노브와의 담화는 당면한 군사정치정세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나는 그날 쥬다노브와 담화하면서 그가 해방된 조선을 민주주의독립국가로 발전시키자면 어떤 방법으로 사업하겠는가 하는데 대한 나의 견해를 몹시 듣고싶어한다는것을 간파하였습니다.

담화도중에 쥬다노브는 불쑥 나에게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후 몇해동안이면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수 있을것 같은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늦어도 2∼3년간이면 해낼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그 대답을 듣자 두손을 마주 비비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뜻밖이라는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쥬다노브가 어째서 해방후 우리의 자주독립국가건설문제에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지고있으며 2∼3년이라는 나의 대답을 듣고 반신반의의 모순된 표정을 짓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짐작하였습니다.

그 까닭이란 다른것이 아닙니다. 얄따회담에서 전후 조선문제처리에 대한 론의가 벌어질 때 루즈벨트가 신탁통치안이라는것을 들고나왔기때문입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아세아의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후원밑에 《민주적제도속에서 교육되여야 한다.》는것이 그의 시종일관한 주장이였습니다.

루즈벨트는 1943년 봄에 워싱톤에서 미국무장관, 영국외상 등과 회담할 때부터 조선과 인도지나는 강대국들의 신탁통치하에 놓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사람에게는 《완전한 독립을 얻기전에 약 40년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너무 우습게 본것 같습니다.

나는 우리 인민이 장기간의 항일무장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되고 단련되였다는것과 그 과정에 자체의 힘으로 국가건설을 해나갈수 있는 견실한 지도핵심과 광범한 애국력량이 준비되였고 풍부한 투쟁경험과 무궁무진한 창조력, 능숙한 조직력과 강력한 동원력을 가지게 되였다는것을 력설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내 설명을 주의깊게 듣고나서 해방후 조선인민의 건국투쟁에 어떤 형태의 지원을 주었으면 좋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쏘련이 독일과 4년동안이나 전쟁을 했고 앞으로 또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르어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한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는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는 력대적으로 사대주의가 망국의 근원으로 존재해왔다, 새 조국을 건설할 때는 사대주의로 인한 피페가 절대로 없게 하자는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우리가 기대하는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쏘련의 정치적지지이다, 쏘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문제가 조선인민의 리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내 대답을 듣고 만족해하였습니다.

그는 얼마전에 동구라파의 어떤 나라 사람이 나를 만나자마자 자기 나라는 본래부터 경제적으로 락후한데다가 전쟁피해가 막심해서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쏘련이 큰집이 된셈치고 도와주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립장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이것이 바로 동방과 서방의 차이, 해뜨는 나라와 해지는 나라의 차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