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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9월 22일

평양시간



력사유적


단군릉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기슭에 자리잡고있으며 조선민족의 유구성과 단일성을 보여주는 민족의 성지이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세운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의 무덤으로서 반만년의 유구한 단일민족-조선의 력사를 실증해주는 귀중한 력사유적이다.

단군은 B.C.30세기초 우리 나라에서 첫 노예소유자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


단군릉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정력적인 령도와 세심한 지도밑에 주체83(1994)년 10월에 화강석을 다듬어 쌓아올린 단군릉이 개축되였다. 단군릉의 부지면적은 45정보이다.

단군릉은 개건기념비구역과 석인상구역, 무덤구역으로 되여있다.

개건기념비구역에는 릉문과 단군릉개건기념비, 단군릉기적비가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석인상구역에는 측근신하상 8상과 단군의 아들상 4상이 당시의 관직등급에 따라 배치되여있다.

무덤안으로 들어가려면 무덤뒤면에 있는 3개의 돌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그 한개 돌문의 무게는 1.2t이상이나 된다. 무덤안칸에는 단군과 그의 안해의 유골이 특수투명유리로 된 관에 안치되여있다.

릉은 정4각형의 피라미드식 돌무덤으로 되여있다. 릉축조에 쓰인 돌의 개수는 릉을 건설한 년도를 상징하여 1994개이며 제일 큰 돌의 무게는 21t이다. 릉의 한변의 길이는 50m이며 높이는 22m이다.

릉앞에는 제단우에 돌상과 돌향로가 있고 네모서리에는 한쌍의 돌범상과 검탑이 있다. 돌범조각상(높이 3.5m, 길이 6.2m, 무게 90여t)은 동방에 강한 국가를 세운 고조선인민들의 슬기와 용맹을 상징하며 고조선의 고유한 비파형단검을 형상한 검탑(높이 7m)은 고대조선사람들의 높은 문화발전수준과 진취적기상을 보여준다.

릉에는 조선민족이 시조왕을 신성화하고 잘 받드는것을 미덕으로 여겨온 풍습과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깃들어있다.


동명왕릉

동명왕릉은 평양시 중심에서 25km 떨어진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다.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였으며 지난날 우리 나라 력사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고구려(B.C.277년-A.D.668년)의 시조 동명왕(본명 고주몽)의 릉이다. 동명왕의 무덤은 고구려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시조왕의 무덤을 함께 옮기는 풍습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왔다.

동명왕릉은 주체82(1993)년 5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동명왕의 생일 2 291돐을 맞으며 력사주의적원칙에서 훌륭히 개건되였다. 170여정보의 부지안에 왕릉구역, 정릉사구역, 신하무덤구역이 있다.

왕릉구역에는 조선식건축술로 특색있게 세워진 릉문과 왕릉, 문무관석상, 기타 돌조각상들과 비석들, 제당이 있다.

릉안에는 원래 값진 유물들이 수많이 있었으나 지난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일본강점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도굴당하였다.

무덤안칸 벽면에는 련꽃을 형상한 벽화가 그려져있다.

정릉사는 동명왕릉을 옮겨올 때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과 함께 지은 절이다. 이 절은 동서 223m, 남북 133m되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3만 7 000㎡의 넓은 면적을 가진 큰 절이다.

신하무덤구역에는 동명왕과 함께 나라를 세운 15개의 동명왕의 신하들의 큰 무덤들이 있다.

동명왕릉은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이다.


광법사

중앙동물원에서 북동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다.

광법사는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도한 아도가 세운것이라고 전해지고있는데 대성산성에 있던 10여개의 절가운데서 가장 큰 건물이였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18세기중엽에 세웠던것을 주체79(1990)년에 복구한것이다.

1727년에 세워진 광법사사적비에 의하면 이곳에는 이곳에는 원래 보광전, 명부전, 칠성탑, 삼일암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근세기까지 보존되여오던 건물들은 조선전쟁시기 조선전쟁시기 미제의 폭격에 의하여 전부 파괴되였다.

지금의 광법사는 대웅전과 동, 서 승당 그리고 해탈문, 천왕문으로 이루어졌다.

대웅전은 밖에서 보면 2층인것 같으나 안에서 보면 한개 층으로 된 독특한 건축양식을 띠고있다.

광법사의 화려한 건물들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울려 대성산의 풍치를 더욱 돋구어주고있다.


대동문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중세 조선의 대표적인 성문의 하나이다.

6세기중엽에 건설된 대동문은 고구려시기 평양성 내성의 동문이였다.

현재의것은 1635년에 고쳐세운것이다.

전통적인 성문형식을 갖춘 대동문은 16세기 이름난 서예가였던 양사언과 박위가 쓴 현판이 걸려있는것으로 하여 더욱 유명하다.


보통문

보통강기슭 천리마거리어구에 있다.

보통문은 평양성 중성의 서문이였다.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웠다.

그후 여러번 고쳐세웠는데 지금 있는것은 1473년에 다시 세운것이다.

지난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복구하였다.

옛날 보통문앞의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손님배웅(《보통송객》)이 볼만 하다고 하여 《평양8경》의 하나로 불리웠다.

보통문에는 재간이 뛰여난 두 목수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였다.

스승은 대동문을 맡고 제자는 보통문을 맡았는데 문이 거의 완공되여갈무렵 스승은 자기 제자가 짓는 보통문을 찾아가보았다.

그런데 제자가 지은 보통문이 대동문 못지 않게 잘 된데 만족한 스승은 기뻐하며 제자를 도와 보통문을 완성하였다는것이다.

이 문에는 또한 조선전쟁시기 폭격으로 불이 달렸을 때에 희생적으로 불을 끄고 문을 지켜낸 평양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도 깃들어있다.


련광정

련광정

조선의 루정건축을 대표하는 련광정은 평양종옆에 위치하고있다.

고구려시기에 처음 세우고 1111년에 루정을 다시 세웠다.

지금의것은 1670년에 고쳐지은것이다.

예로부터 《관서8경》의 하나로 이름난 련광정은 평양사람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정각에 올라 대동강의 경치를 부감하는것이 인상적이다.

여기에는 외적들의 침입으로부터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계월향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전설과 일화들이 깃들어있다.

고려기시 김황원이라는 이름난 시인은 평양에 대한 시를 지으려다가 두개 련만 지어놓고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에는 자기 재간이 모자란다고 하면서 붓을 꺾어 던지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글이 씌여진 글씨판이 오늘도 두 기둥에 걸려있다.


평양종

대동문옆의 종각안에 있는 력사유물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 평양성사람들에게 평시에는 시간을 알려주고 외적이 침입할 때에는 경보신호를 알려주기 위하여 주조한 종이다.

원래의 종은 화재로 인하여 깨졌기때문에 현재의 종은 1726년에 다시 주조한것이다.

종의 높이는 3.1m, 아구리직경은 1.6m, 무게는 13t 513㎏이다.

평양종은 청동을 녹여 만든것이다.

조선종의 특징과 당시 주조기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종겉면에는 불상, 사천왕상, 구름무늬 등 아름다운 무늬와 종의 래력을 보여주는 글들이 부각되여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손꼽히던 큰 종의 하나로서 모양이 아름답고 그 소리 또한 장중하여 예로부터 《평양의 명물》로 일러왔다.


숭령전과 숭인전

숭령전과 숭인전

만수대예술극장 분수공원 우측에 자리잡고있는 옛 사당건물들이다.

숭령전은 건국시기 단군과 고구려시조 동명왕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조선봉건왕조시기(1429년)에 세운 사당이다.

원래 부속건물이 여러개 되는 규모가 큰 건물이였으나 조선전쟁시기 파괴되여 현재는 다시 보수한 정전과 대문 3간이 있다.

숭인전은 숭령전과 대치하고있는 건물이다.

많은 건물들이 조선전쟁시기에 불타버렸다.

지금의 본전은 고려말기(1325년)에 처음 세운것이 보수를 거치면서 오늘까지 남아있는것이다.

숭인전은 현재 평양에 남아있는 력사유적들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건축물로서 고려시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을밀대

모란봉의 중심봉우리에 있는 정각이다.

6세기중엽에 평양성 내성의 북장대로 세워진것이다.

을밀대란 이름은 고구려시기 애국명장 을밀장군이 나라를 지켜 싸운 곳이라 하여 붙여진것이라고 한다.

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경치가 하도 신비스러워 예로부터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칠성문

칠성문

모란봉극장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 문이다.

6세기중엽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세운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1711년과 1764년에 재건한것이다.

칠성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을 가리키는 북두칠성에서 유래된것이다.

칠성문은 고구려시기부터 《행복의 문》, 《사랑의 문》으로 불리워오면서 수많은 전설들을 전하고있다.

오늘도 진달래꽃, 살구꽃이 만발하는 봄날이면 청춘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이 문을 드나들고있다.


대성산성

대성산성

3~5세기에 대성산의 6개 봉우리를 련결하여 쌓은 성이다.

고구려시기의 성들가운데서 가장 큰 산성의 하나이다.

성의 둘레는 7㎞이상이며 성벽의 총길이는 9㎞이상이다.

기나긴 세월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한 요새였다.

현재 소문봉에 남아있는 약 200m구간의 성벽은 원상그대로 복구한것이다.

성안에서는 식량창고터와 무기고터, 병실터 등 집터들과 못자리들이 발견되였다.

또한 99개의 못이 있었다는 전설에 기초하여 그것들을 다 찾아내였다.

지금 그 못들에는 맑은 물이 가득차있다.


대성산성 남문

대성산성남문

대성산유희장 한가운데 나있는 이 문은 원래 대성산성의 정문으로 리용되던것이다.

고구려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에 세운것이다.

1978년에 원상그대로 복구하였다.

남문에서는 5. 1절을 비롯한 여러 계기들에 국제적인 련환모임들과 음악회, 체육경기가 진행된다.

날이 좋으면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사슴들이 보이는 남문의 경치가 매우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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