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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장

소 원 의 봄

1


이른봄치고는 꽤 잠풍한 날씨였다.

가로수아지마다 연두빛잎새들이 뾰족뾰족 돋아나 생신하고도 포근한 정서를 자아내는 신작로를 따라 흑곤색승용차가 달리고있었다.

깨끗하고 환하게 꾸려진 읍거리를 금방 벗어난 승용차는 옥수천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뻗어간 석비레길로 들어섰다.

차안에는 군당책임비서 장명수와 선봉리 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되여오는 김준석이 타고있었다.

차창밖으로는 전야의 봄풍경이 춤을 추며 흘러가고있었다. 멀리 봉황산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눈석이물이 옥수천에 합류되고 동뚝엔 새파랗게 봄잔디가 돋아나 푸른 주단을 펼쳤다. 얼어붙었던 대지는 따스한 봄볕에 녹아 입김인양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거대한 생명력을 가진 광활한 대자연이 숨을 쉬고있는 모습이였다.

김준석은 이름못할 환희에 가슴 부풀어오름을 느끼며 한껏 심호흡을 하였다. 봄과 함께 자기의 인생도 새롭게 시작되는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얼마전 경애하는 장군님께 맹세의 편지를 올릴 때만 해도 준석은 자기에게 이런 영광이 차례지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혁명앞에 가로놓인 엄혹한 시련을 진두에서 헤쳐나가시는 그토록 바쁘신 가운데서도 몸소 그가 올린 편지를 보아주실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장군님의 활달하신 필체 한획한획에 담겨진 사랑과 믿음이 너무도 고맙고 귀중하여 준석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고향 선봉리 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되여가는 지금 그는 자신이 써올렸던 편지의 구절구절을 다시금 되새겨보고있었다.

《…

저는 전후 농업협동화시기 어버이수령님을 받들어 농업협동화의 앞장에 섰던 아버지처럼 그 어떤 시련과 난관이 막아서도 오직 경애하는 장군님만을 믿고 따르며 쌀로써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키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바로 이 맹세를 굳게 믿으시고 귀중히 여기시는것이다.

(장군님! 장군님의 그 믿음은 저의 한생을 관통하는 영원한 숨결로 될것입니다.)

준석의 가슴은 마냥 벅차올랐다.

《참, 동무 처는 평양태생이라고 했던가?》

장명수책임비서의 물음에 준석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예, 그렇습니다.》

《음…》

장명수는 반백의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농촌생활이 처음일 안해에 대한 웅심깊은 념려였다.

준석은 이미전부터 책임비서에 대하여 이런저런 소문을 들어 대략적으로 알고있었다. 완강한 전개력과 함께 농업 및 건설분야의 실무능력을 겸비한 일군, 원칙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칼로 두부모 자르듯 결단성있게 해제끼는 사람…

그것은 자연히 체격이 굵직하고 엄엄하게 생긴 완력형의 사나이를 그려보게 했다.

이런 기초적인 인상을 가지고있었던탓에 오늘 처음 그와 대면하는 순간 준석은 다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듣고 예상했던바와는 달리 보통키에 몸이 갱핏하고 리지적인 얼굴에 안경을 낀 전형적인 지식인형이였는데 게다가 뜨직뜨직한 낮고 느린 말투를 보아서는 도대체 그런 결단성이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은 몇이나 되나?》

책임비서는 그 뜨직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일곱살난 아들애가 하나 있습니다.》

《일곱살?》

책임비서는 놀라운듯 눈섭을 쭝깃하고 마주보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마흔살에 그 정도면 장가를 늦게 갔구만. 녀자들이 줄을 섰댔겠는데 잔뜩 눈을 높인게 아니요?》

《저, 그런게 아니라…》

준석은 서둘러 부인했으나 정작 뭐라고 설명을 달아야 할지 몰라 갑잘랐다.

《허허…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겠지.

좌우간 가족을 빨리 데려와야겠소. 생활이 안착돼야 사업도 잘할수 있거던.》

《알겠습니다.》

준석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다음순간 그의 눈앞에는 떠나올 때 울먹거리며 바래주던 아들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이들의 예술축전을 앞둔 때여서 당장은 가족을 데리고 올수 없었던것이다.

사정은 사정이고 문제는 아직 단순한 사고밖에 할줄 모르는 어린 아들을 리해시키는것이였다. 학교에 입학하면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 다니며 음악공부할것을 꿈꾸어온 애인데 어린 마음에 실망과 서운함이 오죽하랴.

남편과 함께라면 어떤 고생이라도 다할 각오가 되여있는 리순이조차도 이 문제에서만은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의 지향을 존중하고 아들의 소원도 이룰 다른 묘책이 없어 남몰래 한숨을 쉬던 리순이였다.

새로 배정받아 품들여 꾸려놓은 훌륭한 주택이며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정든 일터며 아침저녁 즐겁게 걷던 수도의 거리를 뒤에 두고 떠난다는것이 결코 말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어머니란 사람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철부지 어린애의 마음에 맺힌 서운함을 어떻게 한순간에 가셔줄수 있단 말인가.

《예성아, 거기에도 유치원이 있고 바이올린을 잘 배워주는 선생님들이 있단다.》

《정말?》

《정말 아니면! 아버지는 농사를 잘 짓구 예성이는 바이올린을 잘해서 아버지장군님께서 우리 고향을 찾아오실 때 기쁨을 드리자꾸나.》

예성이는 그제야 고개를 까딱이였다.

심리적인 제동은 또 다른 면에서도 가해졌다. 평양시내의 가까운 친척, 친우들은 농촌으로 탄원하는 그를 고무해주면서도 은근히 걱정을 표시하는것이였다. 평양에 앉아있던 사람이 농촌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는다는게 간단하겠는가? 더구나 지금같이 어려운 때 자원해 내려갔다가 농사를 잘못 지으면 차라리 안 내려간것만 못하지 않는가 하는것이였다. 준석은 친지들의 우려가 결코 공연한것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미 내짚은 걸음을 되돌려세우고싶지 않았고 또 그럴수도 없었다.

고향땅이 가까와올수록 그의 가슴속에서는 농사를 본때있게 지으려는 의욕이 더욱 굳어져갔다.

《가만, 차를 좀 세우시오.》

책임비서의 말이였다.

차가 급정거했다.

《준석동무, 우리 잠간 내렸다 가기요.》

준석은 의아하여 책임비서를 따라 내렸다.

옥수천동뚝길에서 청화리, 선봉리로 갈라져 들어가는 삼각길목이였다. 그 분기점에 운치있게 자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하얗게 회칠한 밑둥주위에 닭알모양의 조약돌이 일매지게 깔려 원을 그리고 그 둘레로 세멘트콩크리트단이 빙 돌아갔다.

《여기가 바로 20여년전 어버이수령님께서 동무의 아버지에 대해 뜻깊은 말씀을 주신 곳이요.》

준석은 비로소 책임비서가 왜 여기에 차를 세웠는지를 깨닫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때의 이야기를 어찌 눈에 흙이 들어간들 잊을수 있으랴!

《그때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던 나는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를 수행하는 일군들속에 있었소.》

《아니, 그렇습니까?!》

준석은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되물었다.

책임비서의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울리였다.

《바쁘신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바로 이 자리에 차를 멈추고 내리시였소.

멀리 봉황산기슭에 자리잡은 선봉마을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감회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였소.

〈저기가 바로 전후에 농업협동화를 남먼저 실현한 선봉리요. 그 조합의 관리위원장이 김윤기동무였는데 참 좋은 동무였소.

이젠 만나본지도 퍽 오랬는데 여전한지 모르겠구만.〉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는 김윤기영웅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지.

수령님께서는 매우 서운해하시며 한 일군에게 리당에 가서 알아보고 오라고 이르시는것이였소.

때는 뙤약볕이 내려쪼이는 무더운 여름철이였소. 그날 하루에만도 들리셔야 할 현지지도로정이 아름차게 남아있었소. 그처럼 바쁘신 수령님께서 분초를 쪼개야 하는 그 귀중한 시간을 바쳐가시며 한 평범한 농촌일군의 안부를 기다려주시는것이였소.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며 우리 수행원들은 가슴 조이는 긴장과 함께 끓어오르는 감격을 금할수 없었소.

그러는 우리들에게 수령님께서는 김윤기영웅에 대한 추억담을 들려주시였소.

전쟁통에 농촌경리가 그 어느 고장보다 더 혹심하게 파괴된 선봉리에서 협동조합을 맨먼저 조직하던 일, 1955년 전국다수확모범농민대회에 올라온 그를 주석단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시고 토론이 끝나자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해주신 일, 언젠가 평양에 올라가는 그를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동행하신 일…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였소.

〈김윤기동무는 전후 빈터우에서 맨주먹으로 일을 많이 한 사람이요. 농사도 지을래, 전재고아들도 맡아키울래, 대의원사업도 할래…

이 동뚝과 저기 보이는 저수지도 그 동무가 관리위원장을 할 때 건설한거요.

원래 이 농장은 가물피해와 큰물피해를 많이 받는 곳이였는데 내가 와보고 과업을 주었더니 한해사이에 불이 번쩍 나게 해제꼈소.

정말 훌륭한 일군이였소.〉

수령님의 안광에는 잊을수 없는 한 전사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 어려있었소.

잠시후 리당에까지 갔던 일군이 돌아왔소. 그런데 김윤기동무는 상급당의 조치로 몇해전에 다른 농장 관리위원장으로 옮겨갔다가 년로보장을 받았다는것이였소.

〈년로보장을 받았다.… 그것도 다른 리에서…〉

수령님께서는 혼자말씀처럼 뇌이시다가 어째서 그가 다른 농장으로 가게 되였는가고 물으시였소.

그 일군은 뒤떨어진 농장을 추켜세울 목적으로 능력있는 김윤기관리위원장을 옮겨놓은 사연을 말씀드리였소. 그러면서 새 관리위원장을 도와 노상 벌에 나가 산다는것도 덧붙여 말씀올렸지.

〈아마 그럴거요. 달리는 살수 없는 동무이니까.〉

수령님께서는 천천히 이 동뚝길을 거니시며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이윽하여 걸음을 멈추시고 말씀하시였소.

〈김윤기동무가 인생말년에 자기 한생의 넋과 피땀이 깃든 이 선봉땅을 얼마나 그리워하겠소?

그 동무가 이젠 년로보장나이가 지났다지만 다시 고향 선봉리의 관리위원장으로 여생을 빛내이도록 해줍시다.〉

그 말씀에 모두가 가슴 들먹이며 눈굽을 적시였소.》

장명수책임비서의 목소리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준석의 눈에도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맺히였다. 책임비서가 이 자리에 차를 세우게 한 진정의 뜻이 비로소 심장에 마쳐왔다.

격정에 목이 메여 아무말도 못하고있는데 책임비서가 준석이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오늘 고향으로 돌아오는 준석동무를 보니 정말 생각이 깊어지오. 어제날엔 아버지가 수령님의 하늘같은 사랑을 안구 돌아온 그 길로 오늘은 그 아들이 장군님의 믿음을 안구 오니 말이요.

준석동무, 우리 농사를 잘 지어서 그 사랑, 그 믿음에 쌀로써 보답하자구!》

《알겠습니다!》

두사람은 뜨겁게 눈빛을 마주하고 승용차로 향했다.

달리던 승용차는 얼마 못 가 다시 멈춰섰다.

시창앞으로 트렁크를 이손저손에 옮겨쥐며 힘겹게 걷는 처녀의 뒤모습이 다가왔다.

차가 옆에 멈춰서자 처녀는 놀란 얼굴을 돌리였다. 물버들가지같이 호리호리하고 유연해보이는 몸매에 대학생복을 꼭 맞게 입고 굽높은 구두를 신었는데 굽실한 중발머리로 귀밑을 감싼 동그란 얼굴에 반달모양의 쌍까풀진 눈이 금방 물에서 건져낸 머루알같이 정기가 돈다. 한번 보고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삐여지게 아름다운 용모였다.

《어디까지 가나?》

《선봉립니다.》

《어서 타라구.》

《아니, 저…》

처녀는 어쩔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보매 책임비서인줄 아는 모양이다.

《왜? 책임비서 차는 타면 안돼?》

《아이, 아닙니다. 미안해서…》

준석은 얼른 차문을 열고 처녀의 트렁크를 받아놓았다.

《고맙습니다.》

처녀가 준석의 옆자리에 앉자 차는 떠났다.

《그래, 선봉리엔 무슨 일로 가오?》

준석은 어쩐지 처녀의 모습이 낯이 익은것 같아 이렇게 물었다.

《대학을 졸업하구 배치돼 갑니다.》

《그렇소? 어느 대학?》

준석이 흥미가 동해 묻자 처녀의 티 한점 없는 귀여운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농업대학입니다.》

《아, 거 좋구만.》

앞좌석에서 책임비서가 상체를 돌리며 준석을 돌아보았다.

《준석관리위원장이 복이 있소. 부임돼 오는 길에 이런 보배둥이를 만났으니 말이요, 허허…》

《예? 선봉리 관리위원장동지십니까?》

처녀가 놀란 눈길을 확 쳐들며 환성을 지르듯 물었다.

준석이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하자 처녀의 얼굴은 금시 밝아졌다.

부채살같이 활짝 들린 속눈섭밑의 검은 두눈에 기쁨이 차랑차랑 빛났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우리 손잡고 일해보기요.》

준석은 우선우선한 어조로 대답했다.

문화주택들이 줄지어선 선봉마을의 일각이 지척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준석의 가슴은 느닷없이 쿵쿵 높뛰기 시작했다.

이제 도착하면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할것인가? 선봉사람들은 과연 나를 어떻게 맞아줄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불쑥 민영태부위원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원천리하고 평양까지 올라온 그가 자기와 마주앉아 열변을 토하던 목소리가 쟁쟁해왔다.

《자네두 알테지만 농사란 뭐니뭐니해야 기름전, 비료전이 아닌가? 작년에두 기름때문에 모내기때부터 진통을 겪었지. 1년농사치고도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영농공정이 바로 모내기가 아닌가? 하루 한겻만 늦어져도 알곡 몇톤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열흘이 어덴가? 열흘이…

그때 간이 마르고 피가 타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나네.》

늘 웃는 인상이던 영태의 얼굴이 침침하게 흐려졌다. 그러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열기가 올라서 부르짖었다.

《그래 내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가 하니 우리 농사군들이 좀 덜 먹고 덜 입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구 우선 기름문제부터 해결하고봐야 한다는거네. 기름만 있으면 모내기를 와닥닥 제기일에 끝낼수 있구 김매기도 따라세울수 있어. 수송문제도 풀리니 거름생산은 물론 가을걷이도 제때에 해서 낟알허실을 막을수 있구.

결국 농사에서 결정적고리는 기름문제라고 보네. 어떻게든 이번에 다문 얼마간이라두 해결할수 있게 자네가 힘써달라구!》

그렇게도 간절히 부탁했던 휘발유였다.

빈손으로 내려오는 나를 부위원장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줄가?

준석은 머리를 흔들었다. 잠시나마 개인적인 체면과 감정을 앞세웠던 자신이 못마땅하여 이마살을 찌프렸다.

그래,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야. 어떻게 하면 이 선봉땅을 잘 가꾸어 더 많은 낟알을 낼수 있겠는가 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해.

준석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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