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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회


3



황혼이 짙어가는 들길이다.

퇴근시간이 지난 때여서 주위는 더없이 고요하였다.

소재지에서 얼마쯤 떨어져있는 기계화작업반을 향해 수향은 총총히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민금혁의 얼굴모습을 그려보는 처녀의 가슴에선 높뛰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쿵쿵 울린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온 이웃친구일뿐아니라 중학시절 한학급에서 공부한 동창생들이다. 수향이 분단위원장으로 활약할 때 금혁은 학습담당위원이였다. 그들은 학과실력에서 언제나 1, 2등을 다투는 경쟁자들이였다. 한창 갈갬질이 심한 학급의 남자애들이 수향에게 공연히 심술을 부리고 엇드레질을 할 때에도 금혁은 박아놓은듯이 제 자리에 꾹 눌러앉아 공부만 했다. 그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한 자세와 불타는 향학열, 참하고 얌전한 성미속에 감추어진 야심만만한 탐구욕, 곁에서 누가 뭐라든 공부에만 열중하는 그 집중력에 수향은 은근히 탄복하군 하였다. 특히 녀동무들과 마주서기 저어하고 눈길조차 주고받기 쑥스러워하는 그 순진한 성품이 쾌활하고 장난을 즐기는 수향의 호기심을 든장질했다. 하여 일부러 말거리를 만들어 금혁이와 마주섰으며 좋은 학용품이 생겨도 기꺼이 보란듯이 그에게 선사해서 상대방을 당황케 했다. 그때마다 덧이를 드러내며 어줍게 웃는 그 온순하고 어진 얼굴을 보는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웠던지 몰랐다.

집이 곁에 있어서 학교길을 오고갈 때마다 함께 다닐 기회가 많았지만 금혁은 늘 손에 책을 들고 공부하며 걷느라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 수향이도 승벽심이 살아올라 길을 걸으면서 책을 보는 습관을 붙이게 되였다.

이렇게 말없는 경쟁속에서도 금혁은 수향이 모를 문제가 있어 물어보면 성근하게 가르쳐주군 하였다.

그들을 보다 가깝게 만든것은 졸업학년때 있은 과학환상모형전시회였다. 그때 금혁은 하늘의 비구름을 조종하는 전파발신장치모형을 만들어 내놓았고 수향은 우로 벼알이 달리고 뿌리엔 감자알이 달리는 희한한 곡식모형을 내놓았는데 동시에 입선되여 중앙에까지 출품되였다.

이것을 계기로 그들은 서로 지향에서의 공통성과 뉴대감비슷한것을 느끼게 되였다.

대학입학시험에서 수향이 그만 미끄러져버렸다. 금혁이가 대학생복을 척 입고 고향에 나타났을 때 수향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숨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떤 경우에도 우울과 실망을 모르는 처녀, 생기발랄하고 그 무엇에도 구애될줄 모르는 처녀인 수향은 그저 멀리에서 금혁을 올려다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밤이면 머리를 싸매고 이악하게 공부했고 일터로 오갈 때에도 항상 수첩을 들고다니며 외국어단어와 수학공식을 외웠다.

2년후 농업대학에 입학했으며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부터는 같은 대학생의 자격으로 당당히 마주설수가 있었다. 방학때면 고향에서 반가운 상봉이 이루어지군 했지만 매양 기쁨과 부끄러움이 어우러진 사춘기의 우정에서 더이상 벗어나지는 못했다.

수향은 온순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금혁이에 대해 좀더 열정적이고 사나이다운 용기가 있었으면 하는 은근한 불만도 없지 않았다. 그 《사내》다운 《용기》에 대한 수향의 《요구》에 아무런 의무감도 없는 금혁은 수향이를 포함한 주위세계에 아랑곳없이 책에서 눈길을 뗄줄 몰랐다. 그래서 더더구나 정이 가는 금혁이였다.

그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배치되면 금혁이와 나란히 학창시절의 경쟁을 계속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하여 그리고 자기들의 지혜와 재능이 합쳐져 고향땅을 더 아름답게 꽃피워가리라는 랑만적인 꿈으로 하여 자주 가슴을 설레이군 하였다.

먼저 대학을 졸업한 금혁이 도에 떨어졌다는것을 알고는 그만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무엇인가 속히우고 배반당한것만 같은 쓰라린 심정이였다. 그러다가 문뜩 자기들사이엔 아무런 고백도 약속도 없었다는 사실이 의식되자 그만 한숨을 짓고말았다. 그저 이웃이고 동창일따름이였다.

하지만 금혁이가 도에서 낯모를 어떤 처녀를 새로운 벗으로 사귀게 될것이라고 생각하면 까닭없이 가슴이 저려들었다. 학창시절의 아름다왔던 추억과 앞날에 대한 랑만적인 꿈을 통채로 잃어버린 심정이였다.

금혁이를 저주하고 원망할 아무런 명분도 없음을 다시금 깨달은 수향은 모든것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꿈을 창조하리라 결심했다. 하여 더욱 직심스럽게 교과서와 참고서를 파고들었고 방학때는 고향벌의 토양시료를 떠서 분석도 하면서 지력을 높이기 위한 문제를 졸업론문주제로 잡아 완성해나갔다. 그러는 속에 금혁에 대한 생각은 해빛에 이슬이 지듯 사라져갔다.

사람의 감정이란 얼마나 이상야릇한것인가? 졸업을 앞둔 얼마전 뜻밖에도 금혁이가 도농업기계화연구소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향은 금혁에 대한 친근하고 다정했던 감정이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음을 놀랍게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도 모래속에 물이 스며들듯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해있었던것이다.

그때부터 졸업을 기다리는 동안 수향은 내내 비상한 흥분속에 살았다. 각일각 행복을 마중해가는 심정이였다.

오늘도 바로 그런 심정에 휩싸여 사리원에서 군으로, 군에서 리로 단숨에 내려온 그였다. 와서는 정작 어떻게 금혁을 만나야 할가 하고 남몰래 조바심치고있는데 마침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게 된것이다.

수향의 아릿다운 눈과 입귀에는 감출수 없는 기쁨이 새물거렸다. 금혁동무가 그동안 어떻게 변모되였을가? 만나본지 이태나 지났으니 몰라보게 달라졌겠지? 아니, 여전할거야. 공부밖에 모르던 샌님같은 그 모습… 날 보면 어떤 태도로 나올가? 한번 깜짝 놀래워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놀래워줄가 하고 궁리해보았으나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학창시절처럼 무랍없이 그를 대할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계화반이 바라보이는 벌가운데 길에 들어섰을 때 정문을 나온 사람의 형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통키의 호리호리한 몸매에 단정한 걸음새가 대뜸 금혁이라는것을 알려주었다.

수향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굳어졌다. 가슴이 쿵쿵 널뛰듯 하였다.

가까이 다가온 금혁이 수향을 알아보고 흠칠 놀라 멈춰섰다.

《아니, 수향동무가? 언제 왔소?》

금혁은 종이말이를 다른 손에 옮겨쥐고 공연히 안경테를 잡았다놓으며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했다.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는 그 어줍은 행동에 수향은 저도 모르게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도착했어요. 금혁동무, 그동안 잘있었어요?》

《보다싶이… 그러찮아도 수향동무가 인차 졸업하고 온다길래 기다렸소.》

《정말… 제가 보고싶었나요?》

금혁은 대답대신 얼굴만 붉히였다. 기다렸다는 말이나 보고싶었다는 말이나 같고같은 의미를 담고있지만 정작 보고싶었다고 대답하자니 깊이 감추어두었던 마음속을 곁눈질당한것만 같았다.

수향이도 그만 할말을 잊고 가슴만 들먹이였다. 한참만에야 속삭이듯 한마디 했다.

《우린 이렇게 다시 사회생활의 경쟁자가 되였군요.》

《경쟁자라니? 난 아직까지 수향동무와 무엇을 겨루어본적은 없는데…》

《그랬지요, 동문 언제나 내앞에 서있었으니까요. 이 수향이가 뒤에서 숨가쁘게 따르고있는줄은 모르구, 호호…》

수향이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자 금혁은 그제야 리해가 되는듯 시뭇이 따라웃으며 담배를 한대 꺼내들었는데 이것은 그가 생각이 모자라거나 처신이 궁해졌을 때 하는 최근에 붙은 군동작이였다.

그 행동을 여겨보던 수향은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참, 이제 빨리 우리 집에 가자요.》

《아니, 거긴 왜?》

《사업상용무예요.》

수향이 이렇게 안심시켰으나 금혁의 얼굴은 다시 붉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이, 가보면 알게 아니나요? 어서요.》

수향은 걱정스러워하는 금혁을 보기가 재미나서 대답을 피하고 독촉했다.

금혁은 말뚝처럼 굳어진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얼굴엔 잔뜩 긴장되고 심각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가겠다는 심산이였다.

이쯤되면 더는 숨길 재간이 없는 수향이다.

《새로 오신 관리위원장동지가 동물 만나보시겠대요.》

《아니? 새 관리위원장이 도착했소?》

《모르는게군요. 지금 온 농장이 김윤기영웅의 아들이 관리위원장으로 왔다구 얼마나 기뻐들하고있다구요. 능력있는 관리위원장이 왔으니 올해농사부터는 문제없다는거죠.》

《김윤기영웅의 아들이?!》

금혁은 뜻밖인듯 입속으로 뇌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동무 아버지랑 같이 앉아 기다리고계셔요. 어서 가자요.》

수향이 먼저 걸음을 떼자 금혁이도 따라섰다.

무슨 생각엔가 잠겨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는 혼자소리처럼 되물었다.

《윤기영웅의 아들이… 농업위원회에 있던 그 사람이 어떻게 내려왔을가?》

《정말 쉽지 않은분이지요 뭐. 사실 누구나 동경하는 수도 평양을 떠나온다는게 간단한 일이예요? 듣자니까 영웅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구 경애하는 장군님께 편지까지 올리고 왔대요.》

《아니, 그게 사실이요?》

《네, 나도 아까 읍에서 올 때 같이 왔는데 저절루 믿음이 가구 존경이 가더군요.》

수향의 들뜬 기분이 그대로 옮겨갔는지 금혁이도 흥분해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면야!…》

그들은 새 관리위원장을 어서빨리 만나보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걸음을 다우쳤다.

준석은 밖에까지 나와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당의 등나무의자에 그들을 앉히고나서 다정히 물었다.

《금혁인 도에 배치됐다가 우정 고향에 내려왔다지?》

《아직 구실을 못합니다.》

《그 꿈이 소중한거지. 그래, 농기계를 전공하게 된 동기는 뭐나?》

《사실 중학시절엔 하늘의 비구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전파장치같은걸 만드는게 꿈이였습니다. 비현실적인 공상이였지요. 그럴바엔 유압식로보트와 같은 현대적인 농기계를 만들어서 농업을 공업화하는데 기여하고싶었습니다.》

《참 훌륭한 리상이요. 인생을 아름답게 빛내려는 사람은 리상과 목표부터 높이 세우는 법이지.》

준석은 머리를 끄덕이며 이번엔 수향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수향이가 농대를 지망하게 된데도 뜻이 있을테지?》

《예, 저도 어머니가 의학대학에 가라는걸 한사코 농업대학에 갔습니다.

저의 리상은 뭐 그렇게 요란한건 못되는데… 웃지 마십시오. 전 그저 경지면적이 제한되여있는 우리 나라 실정에서 어떻게 하면 집약적으로 농사를 지어 알곡소출을 높일수 있을가 하고 공상하다가 우로는 벼알이 달리고 아래로는 감자가 달리는 새로운 곡식품종을 그려보았답니다.》

《저런! 그것 참 희한한 공상이였구만. 그래서?》

《옳습니다, 저도 그저 랑만적인 공상이라고만 생각했댔지요. 아무리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하고 추리와 도마도를 교잡한다 해도 벼와 감자의 교잡만은 불가능하거던요. 그런데 글쎄 저의 공상이 현실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공상이 현실로 되다니?》

준석과 함께 금혁이도 놀라서 바라보았다.

수향은 그게 재미스러워 생긋 웃음을 짓고는 신나게 이야기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의 두벌농사방침에 따라 벼 하나만 생산하던 논에서 앞그루로 밀, 보리, 감자를 거두어들이니 그게 바로 제가 공상했던 그 꿈의 실현이 아니고 뭔가요?》

《아! 듣고보니 정말 그렇구만, 하하…》

준석은 탄성을 지르고 수향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금혁이도 놀라운 발견을 한듯 안경속의 눈을 빛내였다.

《전 두벌농사방침을 우리 고향땅에도 활짝 꽃피우기 위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물론 나의 땀과 청춘, 모든걸 깡그리 다 바치고싶었습니다.

두벌농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땅의 지력을 높인다든가 생육기일을 앞당길수 있는 재배기술을 연구한다든가… 그래서 땅의 지력을 높이는 문제를 가지고 대학졸업론문도 썼거던요.》

《수향이, 동문 정말 대단한 처녀야!

내 오늘 제일 기쁜게 동무들같은 새 세대 기술자들을 알게 된거요.》

《관리위원장동지도 농사를 더 잘 짓자고 평양을 떠나오지 않았습니까?》

수향이 겸양을 표시하는 말이였다.

《옳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셋은 다같은 꿈을 가지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인생의 길동무들이라고 할수 있소.

길동무가 좋으면 천리도 지척이라는데 우리 힘겨운 짐들을 나누어지구 서로 맞들며 끝까지 한길을 가자구, 어때? 그렇게 할수 있지?》

《예, 좋습니다.》

두 젊은이를 번갈아보는 준석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듬뿍 어리였다.

《우선 수향이는 땅의 지력을 높이는 문제를 가지고 론문도 썼다니까 그 경험을 리용해서 대용비료를 연구해야겠소.》

《알겠습니다.》

이어 준석이 금혁이에게 그동안 대용연료도입을 위한 연구실태와 진척정형을 물었다.

메탄가스도입에서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현재 벼겨가스를 시도하고있다는 금혁의 대답을 들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심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미국놈들이 우리 사회주의를 어째보겠다구 경제봉쇄요, 제재요 하구 미쳐날뛰고있는 조건에서 대용연료, 대용비료도입은 더 미룰수 없는 절박한 문제로 나서고있소. 그 어떤 난관에도 끄떡없이 자체로 농사를 잘 짓는 이것이 바로 우리 농촌에서 사회주의를 지키는 길이 아니겠소?》

수향은 자기의 어깨에 실리는 책임의 무게를 새롭게 느끼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사회주의를 지키는 길》이라는 그 말이 그의 가슴에 엄숙하고도 심각한 의미를 깊이 새겨주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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