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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제 2 장

길 은 많 아 도


1


아름다운 새벽이였다.

청비단을 펴놓은듯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노을이 기폭처럼 솟아오른다. 봉황산의 푸르른 솔숲사이와 바위틈마다엔 연분홍진달래가 한껏 만발했고 과원에 살구꽃구름이 뒤덮였다. 산기슭에 즐비한 집집의 과일나무들도 아지가 보이지 않게 호함진 꽃단장을 하였다. 굴뚝마다에선 부지런한 주부들이 피워올리는 연기가 안개마냥 굼닌다.

즉흥시라도 한수 읊고싶을만큼 정서짙은 풍경이였다.

그러나 준석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될 정신적여유도 없이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계절은 시흥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꽃계절이라도 농민들의 생활은 어려운 고비를 겪고있었다.

새벽마다 마을을 돌면서 몇집씩 가정방문을 해오고있는 그는 요즘 나날이 자책감이 커갔다.

농장원들의 밥그릇에서 흰쌀이 점점 적어져가고있었다.

올해는 어떻게나 농사를 잘 지어 식량문제를 풀고 래년부터는 살림집건설을 적극 밀고나가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모든것이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하나의 결론에 귀착된다.

그런데 당면한 모내기준비에서 부족되는 연유의 해결방도가 아직 묘연한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수리분조에 위임한 대용연료연구는 메탄가스로부터 벼겨가스단계에 이르러 공회전을 거듭하고있다.

오늘 아침 모내기준비대책을 위한 관리일군, 초급일군협의회를 조직하기로 어제 박정운당비서와 합의를 보았었다.

협의회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어 2작업반의 한 집을 더 찾아보기로 하고 둔덕마루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을 내려다보느라니 아침을 짓는 연기들이 굴뚝마다 피여오르는데 유독 입을 다문 하나의 굴뚝이 눈에 걸렸다. 지붕에 해묵은 호박넌출이 검불처럼 널려있는 집이다.

(집이 비였는가?)

내려가보니 대문은 걸려있지 않았다.

《주인 계십니까?》

두세번 거듭 찾아서야 안에서 문기척이 울렸다.

《누구나요?》

따지듯 묻는것이 잔뜩 경계심이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내 관리위원장입니다.》

《예? 어마나…》

비로소 놀란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이내 대문이 열렸다.

열예닐곱 되여보이는 소녀인데 눈망울이 까만게 무척 똑똑해보이면서도 어딘가 수심이 느껴졌다. 그 애는 다소곳이 단발머리를 숙이며 사죄하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제때에 알아뵙지 못해서…》

《오, 집주인이냐? 지나가던 길에 집구경이나 좀 하려구 들렸다.》

《엄마, 어쩌나? 집을 잘 꾸리지 못했는데…》

소녀는 귀바퀴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몹시 당황해했다.

준석이 보기에 마당안의 모든것은 규모있게 정돈되여있었다.

집안팎이 조용한것이 이상했다.

《아버지, 어머니랑 식구들은 다 어디 갔니?》

《저…》

소녀는 아래입술을 감빨더니 혀아래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닌 안계시구 아버진 논물 돌아보러 나갔어요.》

《어머니가 안계시다니… 그럼 네가 금옥이냐?》

《예.》

준석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아이의 머리를 말없이 쓸어주다가 발길을 옮겼다.

부엌문부터 열고 들어갔다. 바깥이나 마찬가지로 부엌안도 먼지 한점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여있었다. 벽회칠도 하얗게 했고 밥가마들도 알른알른 윤기가 돌았다. 그런데 불은 언제 때보았는지 싸늘한 랭기가 서려있다.

《아침밥은 왜 안 짓니?》

《엊저녁에 해놓은 밥이 있어요.》

가마뚜껑을 열어보니 아닌게아니라 강냉이가루밥이 절반나마 들어있었다. 찬장유리로는 고추장과 시금치나물이 들여다보였다.

준석은 말없이 밖으로 나와 나무창고문을 열어보았다. 몇단 안되는 벼짚과 새초단이 댕그라니 남아있을뿐이다. 땔감을 절약하느라고 한꺼번에 밥을 해놓는 모양이다.

창고옆에 잇달려 지은 돼지우리에는 그래도 여라문키로 됐음직한 돼지가 구유통의 식은 먹이를 쩝쩝 핥아먹고있었다.

《돼지는 뭘 먹이냐?》

《지금은 풀이 많아서 가끔 해다주지요 뭐.》

《그러니 닭같은건 기를 생각을 못하겠구나.》

《돌볼 사람이 없어요. 아버진 밤낮 농장일밖에 모르면서두 나한텐 그저 짬만 있으면 공부만 하라구 해요.》

《그래? 정말 훌륭한 아버지를 모시고있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준석은 토방에 신을 벗어놓고 방구들로 올라갔다.

방안에는 금옥이가 공부를 하다만 책들이 밥상우에 그대로 펼쳐져있었다.

《어디 금옥이 공부한걸 좀 볼가?》

《관리위원장아저씨가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걸 아시게요?》

《알지 않구?》

《그럼 이걸 좀… 보아주세요.》

준석은 금옥이 내미는 수학문제풀이장을 받아보았다. 교과서범위를 벗어난 참고문제들이였는데 상당히 어려운 문제들을 용케도 풀어놓은것이 기뻤다.

《우리 금옥이가 정말 대단한 수재로구만. 이만한 수준이면 대학에도 능히 갈수 있겠는데?》

뜻밖에도 금옥이는 시무룩해서 중얼거렸다.

《그런 말 들으면 난 싫어요. 대학 가지두 못할거 괜히…》

《아니 왜? 이렇게 열성스레 공부하면서 그런 신심없는 소린 왜 하는거냐?》

《난 대학 갈려고 공부하는게 아니예요. 그저 중학교기간 하나라도 더 배워두자는거예요.》

《뭐라구?》

준석은 기가 막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금옥이 같이 공부 잘하는 애가 대학에 안 가면 누가 간다는거냐? 아버지가 가지 말라던?》

《아니요. 아버진 내가 대학 안 가겠다면 욕해요. 매를 든적두 있어요.

그래서 다신 그런 말 안하겠다구 약속하긴 했어요.》

금옥이는 머리를 숙이더니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준석은 그가 다하지 못한 말이 비로소 짐작되여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러나 그는 부러 엄하게 타일렀다.

《약속했으면 됐지 무슨 딴 생각을 할게 있냐? 아버진 금옥이 공부 잘하는게 그리두 대견해서 거기서 사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겠는데…

부모는 오직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고 모든 희망을 거기에 거는거다.

공부를 하려면 목표를 높이 세우고 끝까지 해야 해. 자기자신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고향과 나라를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구 말이야, 응?》

금옥은 대답없이 손톱눈만 썰고있었다.

준석은 금옥이가 풀지 못해 애쓰던 문제를 함께 읽어보고 풀이방향과 실머리까지 토론해주었다.

《참, 너 학교갈 시간이 됐겠구나. 늦지 말고 가야지.》

그제야 금옥이도 서둘러 가방을 꾸리였다.

그의 집을 나서는 길로 준석은 총총히 회의장으로 향했다.

리당청사앞에 나와섰던 박정운이 그를 찾았다.

《위원장동무, 토론할게 있네.》

준석이 가까이 가자 정운은 한손에 들고있던 종이장을 내밀었다.

《오늘 협의회끝에 이걸 제기해야겠소.》

무심코 종이장을 들여다보던 준석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것은 체육경기훈련요강이였다.

모내기철까지는 아직 기일이 퍼그나 있지만 그 준비에서 미흡한것이 적지 않았다.

원래 체육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준석이였지만 발을 펴도 이불깃을 보고 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것이였다.

얼핏 훑어보니 종목별, 작업반별경기가 승자전의 방법으로 진행되게 되였고 일단 선수선발이 되면 매일 1시간씩 훈련을 하게 되여있었다. 선수선발원칙은 리당과 관리위원회 그리고 매개 작업반들에서 대표격으로 1명씩 선출하기로 하였다.

《거기에 수정하거나 보충할게 있으면 말하오.

이제 고쳐서 발표하구 오늘 저녁부터 당장 선수선발경기를 하자는거요.

누구보다두 내 위원장동무와 한번 겨뤄보구싶어서그래.》

준석은 불같이 다그어대는 당비서의 성미가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여 대답대신 《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정운은 대뜸 못마땅한 기색이 되였다.

《왜? 늙은게 도전한다구 우습게 여기는게 아닌가?》

《아니, 그런게 아닙니다. 비서동지.》

준석은 황황히 부정하고나서 사정하듯 말했다.

《지금 어디 체육경기 같은데 시간을 허비할 형편이 돼야지요? 이미 벌려놓은 일만 해도 눈코뜰새 없는데…》

《그래서?》

따지듯 묻는 말에 준석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군에 나가기 며칠전에 선수를 선발해도 늦지 않을텐데요. 아직은 시간이…》

《아니, 그럼 군경기에 나가서 선봉리가 꼴찌를 해도 좋다는건가?》

《뭐, 꼴찌야 하겠습니까?》

《훈련을 안하면 맡아놓은 꼴찌지 별수 있나?》

준석은 가는 한숨을 짓고나서 하소하듯 말했다.

《사실은 저두 누구 못지 않은 체육애호가입니다. 경기에서 지고는 잠두 못 자구 밥두 먹지 못하는 정도지요.

하지만 지금 농장형편에서 체육에 신경을 쓰다나면 다른 일거리들이 튀여나가게 될가봐 그럽니다. 솔직히 모내기를 눈앞에 두고 걸린 문제가 한두가집니까? 무슨 시간이 남아돌아가서 체육에까지…》

《이보오, 위원장동무, 그렇게 우는소리 하구 조바심친다구 일이 되오? 시간이 일을 하는게 아니라 정신력이 일을 한다는걸 알아야지. 생산장성의 예비는 언제나 대중의 정신력발동에 있단 말이요.

더구나 어렵구 힘든 때일수록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구 분위기를 고조시켜서 막힌 고리를 뚫고나가야 할게 아니요?

위원장도 한번 상상해보라구. 우리 선봉팀이 군경기에 나가서 1등 하면 농장원들의 사기가 얼마나 올라가겠는가? 그 앙양된 기세루 농사일도 와닥닥 제끼잔 말이요. 어떻소?》

당비서의 말에 준석은 이름할수 없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좋습니다! 까짓거 할바엔 냅다 밀어서 기어코 1등을 하구맙시다!》

《암, 그야 두말할게 있나? 이제야 배짱이 맞는구만, 허허…》

박정운은 흐뭇하게 웃으며 어서 회의장으로 가자고 준석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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