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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8


한편 준석과 헤여진 영순이도 자기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창세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방금전 준석관리위원장이 작업반 개개사람들의 특성과 준비정도, 구체적인 사정을 고려해서 알맞게 처방할줄 알아야 한다고 하던 그 말이 뇌리에 그냥 남아있었기때문이였다. 늦게까지 작업을 시켜놓고 안해도 없는 집에 가서 밥을 먹는지 어쩌는지도 모른채 제 보금자리로 찾아든다면 그게 무슨 반장인가고 추궁하는것만 같았다.

3반장은 정춘화네 집에 나무도 실어다주고 담벽도 통채로 헐어 번듯하게 새로 쌓아주었노라고 자랑을 떡같이 하는데 자기는…

승벽심이 강한 영순은 그런 일에서도 3반장에게 지고싶지 않았다. 뭐든지 더 요긴하고 절실한 문제를 풀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 얼마전에는 우연히 춘화를 만난 기회에 창세에 대한 견해를 슬쩍 타진해보았다.

《우리 작업반에선 그저 금옥이 아버지만큼 성실한 사람이 없지요 뭐. 말이 없구 속이 깊구…

언니생각엔 어때요?》

정춘화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대뜸 긍정하는것이였다.

《그럼! 사람이야 진국이지.》

이때다 하고 영순은 한걸음 더 들어갔다.

《글쎄 그런 사람이 혼자서 살림살이까지 한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마 새 아주머니를 데려오면 끔찍이 사랑해줄거야. 그렇지요?》

인정에 무른 춘화의 눈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그럴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녀자를 얻겠다구 할게 뭐야?》

《왜요?》

《다 큰 딸이 있지 않나? 그 사람이 딸애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어?》

《호, 그러니 언닌 남모르는 그 남자의 마음까지 다 알고있었군요.》

《뭐, 내가?》

《터놓구 말해서 언니같은 녀자와 결합되면 천상배필이지요 뭐.》

영순은 당황해하는 춘화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도 그렇지, 녀자나이 마흔이면 아직 한창나이인데 혼자 고독하게 살 필요가 뭐예요?》

춘화는 알릴듯말듯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다들 그러더라만 녀자야 또 뭐라니? 혼자서 살림도 할수 있구 아들도 둘씩 되는데…》

자기보다도 오히려 홀애비가 걱정이라는것이다.

이쯤하면 창세에 대한 춘화의 감정은 충분히 알수 있었다. 문제는 창세쪽이다. 사실 창세는 무뚝뚝하긴 해도 속이 깊고 책임성이 높은 실농군이였다. 그런데 있을 사람이 없고보니 공연히 뭐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다. 본인자체가 그걸 느끼는지 될수록 사람들과 섭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물관리공을 시켰는데 타고난것처럼 일을 잘했다. 물관리를 하지 않는 계절에도 주로 혼자 할수 있는 작업을 맡겨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별로 잘한 일같지 않았다.

가뜩이나 외로운 사람이 작업반에 나와서까지도 외로운 생활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던 영순은 단단히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나요?》

처녀애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금옥아, 문 열어라, 나 반장이다.》

걀쑴한 철색얼굴이 아버지를 꼭 닮은 금옥이가 냉큼 달려나와 문을 열었다.

《반장아지미, 어떻게 오셨나요?》

《응, 너 저녁 먹었니?》

영순은 금옥이의 볼을 쓸어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네, 지금…》

방안에 밥상을 마주하고있던 창세가 놀라서 굳어졌다.

《욕하지 마세요. 낮엔 시간이 없어서… 언제부터 집에 한번 온다는게 오늘에야 왔군요.》

《반장이 농사만 지을래도 바쁜데, 괜찮소.》

창세는 무슨 당치않은 소리냐는듯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반장구실을 잘 못했어요. 금옥이랑 어떻게 사는지 와보지도 못하고…》

《원 별스럽게 그런 말을… 집구경이래야 뭐 우린 그저 이렇게 사우다.》

창세는 별로 당황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꿋꿋하게 말했다.

방안은 흠할데없이 깨끗하였고 상우에는 강냉이밥이 더운김을 풍기고 고추가루를 듬뿍 친 냉이국이 구미를 돋구었다.

딸애의 일솜씨 역시 아버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며 왜서인지 한숨이 호― 새여나왔다.

《뭐 변변치 못해도 식사나 같이합시다. 얘, 금옥아, 어서…》

창세의 말에 영순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전 가야 해요. 집에서 기다려요.》

그는 자기가 왜 할말도 못하고 이러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애당초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였던가? 그런데 창세네 집 환경과 그의 거동이 영순의 속을 짚어보고 《난 장가갈 필요가 없시다.》 하고 면박을 주는것 같았다.

하지만 대문에까지 따라나오며 창세가 하는 말은 전혀 달랐다.

《반장이 이렇게 찾아왔을적엔 작업반에 무슨 급한 일이 제기된것 같은데 어서 말하시우.》

영순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수 없었다.

《금옥이 아버지, 자신의 생활에서 만족을 느끼세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아니예요, 난 금옥이 아버지가 작업반에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려 락천적으로 살았으면 해서 그래요.》

《타고나길 이렇게 뚝바우인데 어쩌라는거요? 참, 별스럽겐 그러누만. 여느때 직사포같이 내쏘기 잘하는 반장이 오늘 웬일이시우?》

영순은 은근히 자존심이 살아올라 더 숨박곡질하고싶지 않았다.

《좋아요, 솔직히 말하자요. 난 금옥이에게 어머니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걸 말하자는거예요.》

《예?!》

창세는 뜻밖인듯 눈섭을 꿈틀하였다. 움푹한 눈확속의 두눈이 한동안 뚫어지게 영순을 지켜보았다. 그 눈빛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고마움의 정을 표현하고있었다.

그렇다, 한창세도 녀성의 따뜻한 사랑을 간절히 바라고 녀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리웠을것이다.

이것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녀성만이 줄수 있는 행복이 아니겠는가.

영순이 이런 생각을 하며 창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얼핏 방안쪽을 돌아보던 창세가 별안간 성이 나서 영순을 몰아대는것이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릴 하려거든 다시 이 집에 나타나지 마오. 필요없소!》

너무도 돌발적인 변화에 영순은 아연해졌다. 그가 다른 말을 할가 두려운듯 대문이 쾅 닫기였다.

내쫓기다싶이 한 영순은 분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정말 괴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는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마당에 들어서니 불도 켜지 않은 집안팎에 괴괴한 정적만이 드리워있는것이 아닌가? 분명 남편이 먼저 들어왔겠는데 이상했다.

설마하고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니 썰렁하다.

등잔불을 켜고 가마뚜껑을 만져보았으나 역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방안에서는 열살난 아들애가 옷도 벗지 않은채 엎드려 잠들었다. 숙제를 하다만 학습장과 연필이 머리맡에 내동댕이쳐있다.

애아버지가 오늘 어쩐 일일가? 논갈이를 끝냈으니 또 누가 손목을 잡아끈게 아닐가? 그전에도 드문히 그런 일이 있어 번마다 싫은 소리를 했는데 아무렴…

영순은 날마다 저녁가사를 맡아하군 하던 남편의 존재를 새삼스레 느끼며 서운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한숨만 쉬고 앉아있을 경황이 못되였다.

그는 아이의 덞어진 양말을 벗겨가지고 부엌에 나와 빨래함지에 담그어놓고 서둘러 쌀을 일어 가마에 안쳤다.

아궁앞에 벼겨를 한삼태기 쏟아놓고 풍구질을 하는데 피곤이 몰려와 견딜수가 없었다. 졸음을 쫓으며 손잡이를 돌리다말다 하던 그는 끝내 말뚝잠이 들고말았다.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확 끼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여나니 불길이 쓸어나와 어느새 앞머리칼이 끄슬리고 바지무릎과 신발코숭이에 구멍이 났다. 자연히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게만 욕이 나갔다. 논갈이를 끝내고 뜨락또르를 탈곡장에 들여다세웠는데 어디를 갔단 말인가?

은근히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안해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어서야 어떻게 인생의 먼길을 함께 간단 말인가?

밥이 다 잦자 아이를 흔들어깨웠으나 이미 굳잠에 들어 눈을 뜨지 못했다.

할수없이 자리를 깐 그는 저녁을 단념한채 아이를 끼고 누웠다.

이윽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닐세라 술에 푹 취한 남편이 건드러진 소리로 안해를 부르며 들어섰다.

영순은 잠든척 하고 응대를 하지 않았다.

《여보― 잠들었나? 세대주가 들어오기도 전에 잠들어?》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리던 호영이 이번엔 주머니에서 사과알이며 꽈배기봉지를 쏟아놓으며 아들을 불렀다.

《야 승철아, 이것 봐라. 아버지가 특식 가져온거. 자, 일어나라는데》

아이도 깨지 못하자 버럭 성이 나서 안해에게 지청구를 해댔다.

《이거 세대주를 맞이하는 본때가 왜 이래? 나가서 반장이라니까 집에서도 녀왕님행세야?》

영순은 그만 참지 못하고 내쏘았다.

《부끄럽지두 않아요? 지금이 어느때게 술추렴하고 다녀요, 술추렴을?》

《아따 이 사람, 그래 임자만 밤늦게까지 나다닐 권리가 있구 난 뭐 어쩌다 친구생일에도 못 간다는거야? 대체 이 집에 세대주가 누구요? 나요, 당신이요?》

눈이 게슴츠레해서 술냄새를 풍기는 남편이 미워난 영순은 벌떡 일어나 침대가로 갔다. 그리고는 결혼생활초기에 호영이가 쓴 쪽지편지를 손에 들었다. 그것은 사랑싸움으로 둘사이의 《반목》이 《절정》에 달했을 때 호영이 영순의 마음을 눅잦히느라고 썼던 편지였다.

당시로서는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였지만 결혼생활 10년이 되여오는 지금에 와서 호영은 그것을 걸음을 구속하는 《질곡》처럼 여기고있었다.

《자요, 보라요! 당신 손으로 쓴 글이 맞지요? 밑거름이 되겠다, 디딤돌이 되겠다, 일생을 하루와 같이…

난 그래도 당신의 그 마음이 소중해서 일생을 의탁했는데…》

영순은 그만 설음이 북받쳐 얼굴을 싸쥐였다.

《아따, 당신 우는게 아니야? 이거 정말 방법없이 이러겠소?》

리호영이 비로소 제정신이 들어 당황한 소리를 하자 영순은 더욱더 뿔을 세워 다몰아댔다.

《그래, 지금같이 바쁜 때 생일놀이가 뭐라구 찾아다녀요? 홀로 있을 승철이가 걱정되지도 않던가요? 내가 반장일을 하는게 정 싫으면 이제라도 말하라요. 그리고 이 편지두 당신 손으로 찢어버리란 말이예요. 미련없어요.》

《아따, 정신나갔어? 이걸 찢으면 어쩌자는거야?》

호영은 펄쩍 뛰며 안해의 손에서 종이장을 빼앗더니 정히 접어 품속에 넣는것이였다.

영순은 그 모양을 보자 끓던 속이 좀 가라앉아 호― 한숨을 쉬고 눈물을 훔치였다.

《사내가 배짱두 없으면서.》

《내 배짱은 이미 당신에게 다 넘겨주었소. 당신 배짱이 저 혼자의건줄 아오?》

영순은 어이가 없어 호호 하고 웃고말았다.

《당신 아무리 드살을 부려두 내 품에서 벗어나지 못해.》

호영은 이러며 어느새 안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런 포옹과 애무에 영순은 꼼짝못한다. 호영의 뻔한 《전술》을 여러번 겪으면서도 어쩔수없이 매번 지게만 되는 영순이였다.

동시에 남편에게 동자질까지 맡겨버린 죄의식이 슬며시 갈마들었다.

《저도 잘못했어요.》

얼마후 남편과 나란히 누운 영순은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제 가정 하나도 단란하게 꾸리지 못하면서 남의 가정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오지랖넓게 돌아친 생각을 하니 허거픈 생각조차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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