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2 회

제 3 장

사랑을 가꾸라

9


한편 금혁이와 헤여져 정신없이 울며 달려가던 수향은 앞서가던 리순의 손에 붙들리였다.

《얘, 도대체 어떻게 된거니? 그렇게 다정하던 애들이 갑자기 왜 그래? 응?》

《언니! 난 어쩌면 좋아요? 흑…》

수향은 두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울었다.

리순이 그러는 수향을 이끌고 자기 집으로 갔다.

마당에 앉아 강아지를 데리고 놀던 예성이가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와 안기였다.

《예성아, 할머니 안 들어오셨니?》

《응, 나 혼자 있기 심심했댔어.》

《그래서 강아지와 놀고있었니? 유치원에서 오면 숙제부터 하구 풍금련습이랑 하라고 했잖았나?》

《엄마없인 하기 싫은걸 뭐.》

《자, 이제 엄마가 저녁을 지을테니 그동안 풍금 배운걸 타보아라.》

예성이를 방안으로 들여보내고나서 리순은 쌀을 씻어 가마에 안치였다. 얼결에 가마안을 들여다보던 수향은 놀란 소리를 쳤다.

《어마나, 관리위원장동지두 그런 밥을… 잡숫나요?》

가마안에는 흰쌀이 잘 보이지 않을만큼 보리쌀이 반나마 뒤섞여있었고 국가마에는 삶은 무우시래기를 썰어넣는것이였다.

《애아버진 농장원들 식량문제가 풀리기 전엔 절대 흰쌀밥을 잡숫지 않겠다고 하면서 늘 잡곡밥에 시래기국을 달게 잡숫군 한단다.》

《그―래요?》

《자, 우리 함께 불때면서 얘기나 좀 하자.》

리순은 아궁앞에 나무의자 두개를 가져다놓고 풍구질을 시작했다. 수향이 옆에 앉아 삼태기에 담긴 벼겨를 집어 살살 뿌려넣었다.

《자, 이젠 어디 말해봐. 언젠가 수향인 나한테 부러울만치 아름답고 랑만적인 사랑에 대해 말했었지? 난 인차 수향이를 취하도록 만드는 그 멋진 사랑의 대상이 금혁인줄 알았구. 그런데 그새 변했어?》

수향은 한참만에야 나직이 말했다.

《그럼 솔직히 말할테니 조언을 주세요.》

금혁이와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자초지종 다 털어놓고나서 그는 울먹이며 덧붙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잖아요? 난 내 마음속에서 그 동물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동무 입에서 〈깨끗이 잊기요.〉하구 태연한 소리가 나오자 그만 서러움이 북받쳐서… 어떻게나 분하구 야속한지… 그게 무슨 남자야, 글쎄?》

수향이 격분을 토로하는데 리순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알만해. 그건 수향이가 여전히 금혁일 사랑한다는 증거야. 호호…》

《아니예요. 난 정말 그런 나약한 사람이 싫어요. 사나이답지 못한 남자는 싫단 말이예요.》

수향의 토라진 얼굴을 잠시 마주보던 리순은 무엇인가 결심한듯 짤막한 숨을 내쉬고나서 입을 열었다.

《수향인 언젠가 나에게 물었었지? 내가 어떻게 예성이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였는가 하구?

난 사실 아무한테도 그 얘기만은 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오늘 수향이한테만은 말해줘야 할가보구나.》

《?!…》

수향은 은근히 놀라며 리순의 걀숨한 얼굴을 새삼스럽게 지켜보았다.

송리순이 김준석을 알게 된것은 사범대학시절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답사때였다. 그때 졸업반이였던 리순의 학급은 농업대학 2학년의 한 학급과 중대를 구성하고있었는데 바로 김준석이 중대장이였다.

준석은 제대군인, 당원으로서 틀진 체구며 훤칠민틋한 이목구비로 하여 처녀대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되였다. 외형은 첫인상의 호감이라치더라도 지내볼수록 사람됨이 원만하여 매혹이 더 가는 인물이였다. 성미가 시원시원하고 너그러운데다 다정다감하고 진취성이 강하며 통이 크고 인정이 깊었다. 오락회때면 즉흥시랑송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틀어잡았고 체육경기때도 배구, 롱구, 탁구 못하는것이 없었다.

이런 사람은 어느 녀성이나 마음속으로 호감을 가지고 사모할지언정 선뜻 자기 사람으로 견주어보기는 힘든 법이다.

리순이도 그런 소심한 녀성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모든 사람들을 골고루 대해주는 그 윤활유와 같은 성품에서 자기 한녀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였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는 준석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었다.

그것은 행군때마다 남달리 힘들어하며 뒤떨어지는 리순의 《결함》때문이였다.

어머니가 의사인 《덕》에 《위생지도원》의 직분을 지닌 리순은 각종 의약품과 구급치료기구들이 들어있는 남달리 큰 배낭을 지고 걸었는데 그때문인지 남달리 숨차하고 진땀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사실은 리순이자신이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있었다. 떠나기 전부터 어지럼증이 나고 혈압이 떨어져 의사인 어머니로부터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을 듣고왔었다.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아야 할 자기가 오히려 그들의 짐이 된것이다.

리순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다그쳐도 언제나 대렬의 맨뒤에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중대장이 자주 다가와 배낭을 뺏어메군 하였다. 리순이가 아무리 뺏기지 않으려고 고집을 써도 어쩔수가 없었다.

곤장덕의 가파로운 언덕길을 오를 때에는 리순이 준석의 혁띠를 잡고 오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마다 리순은 자기의 나약한 성격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되였다.

그러면서도 이상한것은 준석의 남다른 관심이 결코 싫지 않은것이였다.

리명수를 떠나 포태리로 가는 강행군도중에 정말로 미안한 일이 생겼다.

리순이 끝내 행군도중에 졸도한것이였다.

그가 정신을 차린것은 한밤중 ××군인민병원 구급소생실침대에서였다.

눈을 뜨자 자기앞에 앉아있는 중대장의 얼굴이 안겨왔다.

《정신이 드오? 리순이!》

뜨거운 눈물이 눈귀로 흘러내림을 감각하며 리순은 고개를 비틀었다. 자기가 중대장의 등에 업히여 여기까지 왔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안됐습니다. 저때문에…》

리순은 일어나려고 애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만있소. 동문 며칠동안 안정치료를 받아야 하오. 중대장으로서 명령하오. 알겠소?》

리순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돌아올 때 들리겠소. 의사선생님, 그럼 부탁합니다.》

그가 떠난 뒤 얼마 안있어 날파람있게 생긴 한 대원이 급히 들이닥쳤다. 중대장이 보냈다면서 산꿀 한병을 남겨두고 올 때처럼 급히 돌아갔다.

리순은 병원에 홀로 떨어졌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났다. 백두산에 오를 날이 다가오는것이다.

여기까지 왔다가 백두산에 올라 못보고 중도에서 돌아선단 말인가? 아니, 죽더라도 가야 해!

그러자 기적적으로 힘이 솟구쳤다.

병원에서는 처녀의 간절한 심정에 감동되여 삼지연으로 가는 승용차를 세워 태워주었다. 아무래도 삼지연에서 혈압검사를 한다는데 거기서 걸리면 멀리서 백두산을 구경이라도 하겠다고 졸라대였던것이다.

그가 삼지연에 나타나자 온 중대가 끓었다.

중대장이 엄하게 따져물었다.

《돌아갈 때 들리기로 했는데… 병원에서 보냈단 말이요?》

《중대장동지! 전… 백두산에 오르고싶었습니다, 꿈결에도…》

《안되오. 그 몸으로는…》

《중대장동지!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면… 백두산에 올라보지 못하고 어떻게 돌아서겠습니까? 제발 저를 쫓지 말아주십시오.》

리순은 울먹거렸다. 거절하면 금시 오열이라도 터뜨릴것 같았다.

준석은 더이상 말을 못하고 외면해버렸다.

다행히 혈압검사에서도 허용수치에 들어갔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쾌청하였다.

준석은 리순을 옆에 데리고 백두산에 올랐다.

아, 그 행복, 그 장쾌함이란!…

마치도 인생의 절정에 오른듯 환희와 열광에 온몸이 불탔다.

그들은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기와 필림은 준석이 준비했던것이였다.

뜻깊은 백두산답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석이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리순동무, 사진이 정말 잘되였습니다. 사진을 보니 백두산에 올라보지 못하고 어떻게 돌아서겠는가고 하던 동무의 그 목소리가 가슴을 울립니다.

나는 앞으로 리순동무가 어디서든 백두의 숭고한 넋으로 순결하고 억세게 살아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리순은 사진속에서 웃고있는 준석의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또 보다가, 그리고는 편지의 구절구절을 자자구구 음미하며 읽고 또 읽다가 회답의 필을 들었다.

《중대장동지! 정말 감사합니다. 답사기간 저의 건강을 보살펴주고 백두산까지 오르도록 힘을 준 중대장동지를 저도 잊지 않을것입니다.…

보내준 사진을 마음속깊이 간직하고 한생을 백두산에 올랐던 그 격동적인 순간에 살겠습니다.…》

생활의 흐름은 생각과 일치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지 1년도 못되여 리순은 뜻하지 않은 중병으로 복부에 대수술을 하고 오래동안 병원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문제는 이 병으로 하여 사회생활을 계속 하느냐 마느냐 하는 운명적인 물음앞에 서게 된것이였다.

리순은 그만 절망에 빠졌다. 사람으로 태여나 사람구실을 못할바에야 살아서 뭘하나?

앞날에 대한 신심을 잃은 그는 약도 음식도 먹고싶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건강은 더욱더 악화되여갔다. 이따금 혼수상태에 빠질 때마다 그의 눈앞에서는 인생이라는 커다란 광망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점차 줄어들며 어느덧 한점의 불꽃이 되여 가물거리는것이였다.

리순은 꺼질듯말듯 하는 그 불꽃을 붙잡으려고 모지름을 쓰며 헛소리를 쳤다.

《중대장동지! 날 쫓지 말아주십시오, 중대장동지!》

의사인 어머니는 리순이 찾는 중대장이 누구인가를 잘 알았다. 답사가 끝난 후부터 이태가 돼오도록 딸이 입버릇처럼 외우군 하던 그 중대장이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어느날 농업대학 졸업반인 김준석을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준석은 깜짝 놀라 무작정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서럽게 우는 리순을 따뜻이 위로해주며 절대로 맥을 잃어선 안된다고 고무해주었다.

리순은 머리를 저었다. 그의 마를대로 마른 입술사이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전 이젠 틀렸어요.… 제 인생의 가치란… 이젠 아무것도… 없어요.

고마워요. 이렇게 와주어서…》

《무슨 소릴 하는거요? 리순이! 정신차려!》

준석은 불같이 성이 나서 리순의 두어깨를 잡아흔들었다.

《그래, 영원히 백두산에 올랐던 격동적인 순간에 살겠다던 맹세를 잊어버렸다는거요? 말해봐!》

《잊어버렸는가구요?》

그 말에 리순은 갑자기 찬물벼락을 맞은듯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편지에 썼던 그 말이 비로소 뇌리에 돌이켜졌다.

리순은 울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예요! 아니, 그럴수 없어요.》

이튿날 준석은 겉표지가 해면을 넣은것처럼 북신북신한 두툼한 일기장 한권을 가지고 찾아왔다.

첫페지를 번지니 짤막한 시 한수가 적혀있다.


눈속에서도 지지 않는

백두의 꽃

만병초의 그 넋이

여기서 숨쉬기를


가슴이 뜨거웠다.

얼어붙었던 심장이 쿵쿵 높뛰였다.

그날부터 리순은 매일매일 그 일기장에 시를 썼다.

그 과정에 정신적인 허탈감으로부터 벗어나 생의 의욕과 열정의 충만감을 얻게 되였다.

일요일마다 면회를 온 준석은 그동안에 쓴 시들을 보아주고 그뒤에 화답시를 써주군 하였다.

마음절반 약절반이라더니 리순의 병세는 기적적으로 호전되여갔다.

6개월만에는 퇴원하여 다시 일을 하게 되였다.

리순은 준석을 한없이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일생의 벗으로 삼을 욕망은 감히 가질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처녀의 심장은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은인을 그려 남몰래 타고 또 탔다. 과연 그 불길을 무엇으로 끌수 있단 말인가.

딸의 심정을 알아챈 어머니도 속수무책으로 한숨만 쉴뿐이였다. 두차례나 병을 이겨낸 딸이 이제는 진짜로 치료하기 힘든 《병》을 만난것이다.

림상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온 어머니였지만 사랑병을 앓는 환자에겐 백약이 무효라는 진단밖에 내릴수 없었다. 오직 시간의 흐름에 운명을 맡기는수밖에 없는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준석이 집에 찾아와 정식 결혼을 청하였을 때 리순의 어머니는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였다.

《이렇게 난 한 인간의 뜨거운 사랑과 지극한 정성으로 해서 인생의 시련을 이겨냈구 오늘과 같이 건강하고 행복한 어머니가 될수 있었단다.》

이야기는 끝나고 사르륵사르륵 풍구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였다.

수향은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의 눈귀엔 어느새 함초롬히 눈물이 맺혀있었다.

《난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어요. 진정한 사랑이 어떤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철학을 요란히 떠들어왔으니… 한 인간에 대한 의리를 지킬줄 모르는 제가 고향을 위해,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인들 제바로 할수 있겠나요?》

《수향이, 나도 아직은 사랑이 무엇인지 다는 모르겠다만 가장 고결한 사랑은 자기희생과 사심없는 헌신으로 불행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주고 나약한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랑이 아닐가?》

수향은 깊은 생각에 잠긴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의 뇌리에는 피뜩 어느 잡지에선가 보았던 글의 한토막이 떠올랐다.

《자기자신을 초월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사랑할수 없다. 사랑은 리기를 버리는것이다.

결함때문에 사랑할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자기가 생각했던 사랑의 전제―호상성과는 엄연히 구별되는것이였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도서련재
인생의 열매 제54회 인생의 열매 제53회 인생의 열매 제52회 인생의 열매 제51회 인생의 열매 제50회 인생의 열매 제49회 인생의 열매 제48회 인생의 열매 제47회 인생의 열매 제46회 인생의 열매 제45회 인생의 열매 제44회 인생의 열매 제43회 인생의 열매 제42회 인생의 열매 제41회 인생의 열매 제40회 인생의 열매 제39회 인생의 열매 제38회 인생의 열매 제37회 인생의 열매 제36회 인생의 열매 제35회 인생의 열매 제34회 인생의 열매 제33회 인생의 열매 제32회 인생의 열매 제31회 인생의 열매 제30회 인생의 열매 제29회 인생의 열매 제28회 인생의 열매 제27회 인생의 열매 제26회 인생의 열매 제25회 인생의 열매 제24회 인생의 열매 제23회 인생의 열매 제22회 인생의 열매 제21회 인생의 열매 제20회 인생의 열매 제19회 인생의 열매 제18회 인생의 열매 제17회 인생의 열매 제16회 인생의 열매 제15회 인생의 열매 제14회 인생의 열매 제13회 인생의 열매 제12회 인생의 열매 제11회 인생의 열매 제10회 인생의 열매 제9회 인생의 열매 제8회 인생의 열매 제7회 인생의 열매 제6회 인생의 열매 제5회 인생의 열매 제4회 인생의 열매 제3회 인생의 열매 제2회 인생의 열매 제1회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