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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제 3 장

사랑을 가꾸라

10


한동안 가물더니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새벽녘이 되여 멎었으나 바람은 더더욱 지동치듯 불어쳤다.

천지를 들부실듯 광란스레 부는 바람에 전선줄들이 울부짖었다. 길가의 나무아지들이 금시 부러질듯이 휘청거리고 무성한 잎새들이 쏴쏴― 아츠럽게 뒤설레였다.

준석은 농작물들이 바람피해를 입지 않았는가를 확인하며 포전들을 돌고있었다.

사전에 기상예보를 받고 풍수해대책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갓 심은 나무 한그루가 바람에 뿌리채 뽑힌것을 보고 땅을 깊숙이 파서 다시 든든히 묻어주었다.

읍농장과 경계를 이루는 2작업반 마지막포전에 이르렀을 때 논고를 손질하는 창세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허옇게 물날은 밤색작업복의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바지가랭이도 정갱이가 드러나게 버쩍 추켜올린 그는 걸싼 삽질로 퇴수로를 터놓을것은 터놓고 보강할것은 보강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있었다.

누가 보건말건 혼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는 그를 보느라니 자연 생각이 깊어졌다.

저렇듯 성실한 실농군의 흙빛얼굴에 밝은 웃음까지 넘칠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바쁜 일에 다몰려 그의 사생활에까지 관심을 돌려오지 못한것이 못내 가책이 되였다.

금옥이문제만 해도 그랬다.

어머니도 없고 자식이라고는 자기 하나뿐이니 현재도 가정일의 부담에 눌리워 더 할수 있는 공부도 못하고있으며 상급학교생각은 애당초 하지부터 않는다는것이였다.

가정사정으로 앞날의 희망을 포기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준석은 창세가 하루빨리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언제부터 금옥이네 집을 찾아가 한창세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리라 벼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어 오늘에 이르렀던것이다.

준석은 다리를 걷고 미끌거리는 논두렁에 들어섰다.

《수골하오, 창세동무.》

《예, 나왔습니까?》

창세는 적동색얼굴이 거의 무표정하다 할 정도로 덤덤히 인사를 했다.

퇴수로를 따라 논물이 소리치며 흘러내려가고있다.

《비료는 언제 주었는가요?》

《나흘전에 주었습니다.》

《참 다행이군요.》

논에 준 비료가 땅에 흡착되기 전에 비가 와서 논물을 뽑게 되면 아까운 비료물이 흘러나가게 되는것이다. 이것을 예견하여 관리위원회에서는 부위원장이 미리미리 기상관측소와 련계를 가지고 시비날자를 계획하는것이였다.

《아침식사도 못하고 나왔겠군요.》

《이제 들어가 해야지요.》

《자, 한대 피우고 하시오.》

준석이 담배를 권하자 창세는 하던 일을 마저 끝내야 하겠다며 귀바퀴에 끼운채 그냥 일손을 놀리였다.

《잠간이면 되우다.… 이젠 다 됐수다.》

그는 정말 잠간사이에 일을 마무리하고 논두렁으로 올라섰다.

준석은 그와 나란히 마을로 들어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였다.

《일전에 학교에 들려 알아보니 그 집 딸 금옥이가 그렇게도 공부를 잘 한다면서요?》

《잘하기야 뭘…》

《이젠 졸업반인데 대학에 보낼 준비를 해야지요?》

《대학엘요?》

창세는 이마살을 찌프리더니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애가 어디 대학엘 가겠다고 하나요?》

《홀로 남을 아버지를 생각해서겠지요.》

《…》

창세가 말을 못하는 틈을 타서 준석은 절절히 권고했다.

《딸애의 전도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새 어머니를 데려와야겠습니다. 먼저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산 사람은 생활의 공백을 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그때문만이 아니지요.》

창세는 꺼질듯 한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뿜고나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딸애의 마음에… 그늘을 져주고싶질 않수다.》

순간 준석은 가슴이 찌르르해옴을 느끼였다.

딸자식 하나를 위해 자기의 여반생을 고스란히 독신으로 보내려는 그 마음에 감동이 되면서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수가 없었다.

《어째서 새 어머니를 맞는것이 마음에 그늘을 주는걸로 되는가요? 진정으로 딸애를 생각한다면 그 애가 가정적부담에서 벗어나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게 하는것이 옳은 처사가 아닐가요?》

《글쎄요, 그렇긴 하지마는…》

《창세동무가 자기 울타리를 허물지 못하구 자신을 필요이상으로 구속하며 사는것은 자기 자식이나 곁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구 속을 주지 않기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소?》

《허 참, 그건 너무한 말씀같수다.》

창세가 심각한 낯빛으로 부정해나오자 준석은 껄껄 웃어버렸다.

《허허… 개인생활을 가지고 어마어마하게 감투를 씌운다는거겠지요?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여기고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것이 우리 사람들의 체질화된 감정이구 하나의 사회적풍조라고 할수 있지요.

헌데 창세동무네같이 고적하게 살면서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애가 가정사정으로 희망을 꺾이우는걸 볼 때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그 집단에 밝고 랑만적인 웃음이 넘쳐날수 있겠는가 말이요.

창세동무도 남들의 가슴아픈 동정의 눈길을 받는게 그렇게 즐겁지는 않겠지요?》

《허 참, 그게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인가요?

난 아직까지 그런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수다. 나와서 맡은 일만 책임적으로 하면 된다 했지요.》

《그게 바루 자기 울타리속에서만 사고하는 표현이지요. 남들이야 어떻게 보구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관계없다는거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왜서 집단의 기쁨이 되지 못하구 동정을 받아야 하겠소? 난 이게 안타깝단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창세는 뒤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심정을 헤아려본 준석이 고무하듯 힘주어 말했다.

《새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뿐아니라 온 농장사람들이 그걸 바랍니다.

아, 금옥이도 그렇지요. 마음씨 고운 어머니를 맞으면야 싫다구 할 까닭이 뭐겠소?

다 큰 딸 눈치밥 먹을가봐 걱정이요?》

《허 참, 관리위원장동지가 이렇게까지 들이대니 어디… 하지만 내 좀 생각은 해봐야겠수다.》

《뭐 에돌것 있소? 말난김에 대상자문제까지 토론해봅시다. 내 보기엔 3반에 정춘화동무가 꼭 적합할것 같은데 창세동무생각은 어떻소?》

창세의 덤덤하던 얼굴에 열적은 웃음이 얼핏 스쳐갔다.

《글쎄… 그 내인의 속을 알겠습니까?》

《남자만 결심이 되면야 문제될게 있소? 솔직히 그 아주머니도 생활력이 강하고 일솜씨가 착실한데 혼자 살다보니 농장일에 모범이 될수 있는것도 말밥에 오르고있지 않소?

내 동무만 좋다면 밥을 싸가지고 다니며 소갤 하겠소.》

《아니 그러지 마시우다. 일이 바쁜 관리위원장동지가 그런 문제에까지 신경쓸새가 어디 있겠다구요?》

《구태여 소개가 필요없다는거겠지요? 하긴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훨씬 더 사나이다운 일이지요.

그럼 난 좋은 소식이 있기만 기다리겠습니다, 하하…》

준석은 기분이 좋아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창세와 헤여져 거뜬한 걸음으로 관리위원회앞마당에 들어서는데 사무실전화가 요란스레 울었다.

방에 들어가 송수화기를 드니 김대일경영위원장이였다.

《관리위원장동무요? 그래 밤새 비바람에 의한 피해는 없었소?》

《금방 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특별한 후과는 나타난게 없습니다.》

실무적인 말이 한두마디 더 오고간 뒤 김대일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거 기계화반 기사 민금혁이 말이요, 부위원장 아들. 군으로 소환할 필요가 있어서 담화를 좀 해야겠는데 오늘로 들여보내주오.》

《군으로 소환한다구요?》

준석은 뜻밖의 말에 놀라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자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금혁이야 도에 배치됐던것두 마다하구 선봉땅을 꽃피우겠다고 온 기사가 아닙니까?》

《제발 그 협소한 생각을 버리라구. 선봉리도 우리 군안의 선봉리겠지? 군에서 새로운 농기계를 발명하면 어련히 온 군에 일반화될텐데 뭘 그러나?》

《그렇지만 지금 한창 직화로연구가 절정에 올랐는데 어떻게 보냅니까?》

《직화로연구도 전문기업소에 와서 하는게 더 유리하지 않겠나.》

《…》

준석은 도저히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화로불을 안은듯 속이 화끈화끈 달아오를뿐이였다.

그의 거치른 숨결소리가 전류를 타고 흘러갔는지 대일은 다소 타협적으로 나왔다.

《관리위원장이 정 내놓을수 없다면 본인과 담화라도 해보구 결심하겠으니 들여보내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준석이 이토록 서슴없이 대답한것은 금혁을 믿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그 믿음이 모래성마냥 허물어질줄을 어이 알았으랴.

금혁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대신 그가 군으로의 소환에 동의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준석은 격분에 앞서 아연했다.

사람이… 사람이 이럴수도 있단 말인가?

금혁이의 깨끗하고 순진하던 마음이 어떻게 되여 믿음을 저버리는데까지 이르게 되였는가?

기계화반에 나가 버림받은 직화로를 보느라니 참기 어려운 고뇌와 진통이 온몸에 엄습했다.

사실 금혁이 아니면 직화로를 맡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문제이기때문이다.

새 세대들을 주역으로 고향땅을 대를 이어 꽃피워가자고 했던 그였다. 고향땅의 모든 사람들을 땅과 같이 진실하고 의리깊고 변심없는 인간들로 키우자고 했던 그였다.

번민에 잠긴 그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시험포로 향해졌다.

금혁이로부터 배반당한 수향의 아픔은 또 어떠하겠는지?

어딘가 쓰러져 울고있을지도 모를 처녀를 위로해주고싶었다.

시험포에서는 안해 리순이 혼자 논김을 매고있었다.

《수향인 어딜 갔소?》

준석은 자기 목소리같지 않게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요전날 농업과학원 연구사한테서 질석이 화학비료의 효과성을 높인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노상 그 생각뿐이예요.

짬만 있으면 여기저기 톺아다니며 질석이 나오는델 찾아다니는거지요.

오늘은 명산리에 가서라도 질석을 실어와야겠다구 달구지까지 끌고나갔군요.》

《그래!…》

준석은 가슴 울리는 충격에 더 말을 못하였다.

묵묵히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그의 생각은 깊어갔다.

금혁이와 수향이… 한토양에서 동시에 나서자란 두 인간의 모습이 어쩌면 이다지도 상반된단 말인가?

결국 난관을 이겨내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천천히 무겁게 옮겨지던 그의 발걸음은 소재지입구에 서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앞에 문뜩 멈추어섰다.

미친듯이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이 서있는 거목의 힘! 그 힘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아침에 보았던, 바람에 휘청거리다 뿌리채 뽑혀 딩굴던 연약한 나무가 떠올랐다.

뿌리는 있건만 토양속에 든든히, 깊이 박히지 못한탓에 뽑히워 죽을번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이 거목도 대지에 뿌리를 깊이 박았기에 그 어떤 광풍에도 흔들림없이 억세게 서있는것이다.

날은 저물었으나 느티나무줄기에 주먹을 짚고선 준석은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그의 머리우에서 광풍은 여전히 몰아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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