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54 회

종 장

숨쉬는 넋


이해 11월 중순 어느날의 깊은 밤이였다.

삼라만상이 잠들어 어둠과 고요속에 잠긴 마을 한복판에 유독 불이 켜진 하나의 창문이 있었다.

김준석의 집이였다.

아래방에서는 잠든 식구들의 고르로운 숨소리가 겨끔내기로 울리는데 웃방에서는 김준석이 책상을 마주하고 점도록 앉아있었다. 책상우에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수첩이 펼쳐져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후 준석은 몇번이나 수기책을 펼쳐보았지만 한번도 여백에 펜을 대여본적이 없었다. 아직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의무감의 충동을 눌러버리군 하였던것이다.

숙연한 감격에 젖어 한페지한페지 번져나가던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필적에 이르자 다시금 그 문구를 새겨보았다.

《나는 우리 가문의 아들딸들과 손자손녀들이 여기에 대를 이어가며 보답의 자욱을 새겨갈것을 바라서 공백을 남긴채 펜을 놓는다.》

준석은 마침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책상우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을 향해 마음속으로 뇌이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넋이 깃든 이 수첩에 오늘에야 이 아들이 보답의 첫 페지를 새깁니다.)

준석은 심호흡을 하고나서 펜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전자계산기》로 불리우는 회계장이 제일 바쁘고 진땀뽑는 날이였다.

각 작업반의 알곡생산수자를 종합한 통계자료를 관리위원장실로 가져왔는데 나는 벌써 몇번째나 다시 계산해오라고 되돌려보냈던것이다.

《아니 젠장, 뭐가 잘못됐다고 그럴가?》

회계장은 흠뻑 젖은 손수건으로 벗어진 이마와 실한 목덜미를 연방 문질러대며 두덜거린다. 땀이 잦을새없이 줄곧 닥달을 받으니 증이 날만도 할것이다. 여느때같으면 노여웠을 그 불평소리가 이날은 오히려 기쁘게만 들렸다.

사실 나는 회계장에게 종합통계를 다시 해올것을 거듭거듭 요구하면서도 같은 수자가 떨어지기를 내심 간절히 바라고있었다. 회계장은 자기가 관리위원장의 의심을 산것이 바로 예상수확고를 뛰여넘은 실수확고의 놀라운 수자때문이라는것을 미처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연의 품에 안겨 마음껏 기쁨을 터치고싶었다.

사무실을 나선 나는 봉황산으로 향했다.

내 마음을 알아서인듯 날씨도 쾌청했다.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새파랗게 열렸는데 산산한 바람결에 길가의 코스모스꽃들이 춤을 추듯 설레였다.

산기슭을 뒤덮은 잡관목잎새들은 마가을의 해빛에 붉고 푸르고 누렇게 물들어 한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그 한가운데로 수정같이 맑은 골개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무덕무덕 우거진 잔풀숲을 적시며 소리없이 흘러내리다가 자갈이나 바위들이 깔린 곳에서는 조잘조잘, 도골도골, 쪼록쪼록 각이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큰돌, 작은돌, 삐죽한 돌, 네모난 돌.

…조각가의 손에서 깎이고 다듬어진듯 한 그 기기묘묘한 돌바닥을 스치는 물결의 다양한 음향은 마치도 그 어떤 미지의 생명체의 조잘거림 같기도 하고 고정음계를 짚어대는 신비한 악기소리같기도 하다.

건듯 불어오는 바람에 하르르한 깃털같은 왁새풀꽃이며 복실복실한 강아지꼬리같은 새초풀꽃들이 환영의 원무를 펼친 무용수들마냥 한방향으로 누워 한본새로 몸을 흔든다. 그렇다, 말 못하는 자연도 나의 기쁨을 축하해주고있는것이다.

나는 깍지낀 손을 베고 풀밭에 벌렁 누웠다.

만시름을 잊은 몸이 구름을 타고 붕 떠오르는것만 같다.

높이 들린 비취색하늘이 눈이 부시게 안겨온다.

아아한 창공은 그대로 나래펴고 날아오를 꿈의 활무대인듯싶다.

귀전엔 솨솨― 장쾌한 숲의 설레임소리, 빗쭁 쪼르르 새소리, 또르륵또르륵 구을러내리는 물소리.

느닷없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뜨거운 눈물이 눈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 기뻐하십시오. 올해농사에서 우리 선봉리가 장훈을 불렀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 기쁨의 보고를 드릴수 있게 되였습니다.)

아버지의 화답소리가 메아리쳐왔다.

《장하다! 고맙다! 내 아들아!》

급격히 숨결이 높아지면서 심장이 뻐근해왔다.

이름할수 없는 충동에 떠밀려 일어난 나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수원쪽으로 올라갔다.…


며칠후인 11월초.

우리 선봉리에서는 김대일경영위원장의 주최하에 도적인 결산분배 방식상학이 진행되였다.

각 군들에서 온 당, 행정책임일군들과 농업지도일군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에게 물었다.

《남들은 아직 탈곡도 못 끝내고있는데 이 농장은 어떻게 결산분배를 벌써 하게 되였습니까?》

《우리는 낟알허실을 막고 실수확고를 높이기 위해 탈곡과 량곡포장 및 수매를 동시에 밀고나갔습니다.》

나의 단마디대답이 불만이였던지 따지고드는듯 한 질문들이 날아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수 없습니까?》

《탈곡과 량곡수매를 어떻게 동시에 한다는겁니까?》

《포장용기는 어떻게 보장하는가요?》

나는 침착하고 조리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농장에서는 우선 천평베기전투를 벌려 벼수확을 열흘동안에 와닥닥 끝내고 탈곡에 들어갔기때문에 시작부터 남보다 앞서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탈곡과 량곡수매를 병행시키기 위해서 가마니짜기를 중요하게 내밀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전력사정으로 가마니기계를 만가동, 만부하시킬수 없는것이였습니다. 포장용기가 선행되지 못하면 낟알처리에 많은 공정과 시간과 로력이 들게 되며 따라서 그만큼 량곡허실을 피할수 없게 되지요.》

《바로 그렇단 말입니다.》

성급한 누군가가 다음말을 촉구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내는기계에 도입했던 직화로를 탈곡기와 가마니기계에 리용하여 부족되는 전력을 대용했던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여러분이 이제 하게 되는 참관과정에 직접 보시게 될겝니다.》

곧 참관사업이 진행되였다.

참관자들의 배움의 열의는 대단했다.

현대적으로 개축된 2중3대혁명붉은기 2작업반의 탈곡장, 선전실, 흙보산비료공장, 2층으로 지은 축사, 소사 등을 돌아보던 참관자들은 방직공장을 방불케 하는 가마니생산현장(일명 《가마니공장》이라고도 한다.)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거기서는 전기대신 직화로에 의한 잡관목가스로 기계들을 돌리고있었다.

그 공정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던 손님들이 믿어지지 않는지 또 물었다.

《이 직화로로 탈곡기도 돌린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대용연료이면서 대용동력도 되는구만요. 결국 자체로 농사지을수 있는 비결이 아닙니까?》

《이 대단한걸 어떻게 착상하고 도입하게 되였습니까?》

《설계와 제작, 운전조작상원리에 대해 설명해줄수 있습니까?》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그들의 호기심에 어떻게 일일이 대답을 주어야 할지? 어쨌든 진땀나도록 설명을 해주고나서 이렇게 결론을 달았다.

《만능의 리치는 오직 당에서 하라는대로 집단주의에 의거해서 자력갱생하는데 있습니다.》

참관자들은 깊은 감동과 공감을 표시했다.

이날 결산분배에서는 집집마다 많은 현금과 식량외에 우대곡과 우대상품들이 차례졌다.

우리 집에도 적지 않은 현금과 알곡이 분배되였다.

그날 저녁 온 집안이 기쁨에 겨워 흥성거렸다.

인민학교(당시) 2학년생인 예성이는 바이올린으로 《웃음많은 우리집》을 신나게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어른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어머니는 저고리고름으로 눈시울을 훔치며 이런 말을 했다.

《국가계획두 넘쳐하구 우리 선봉사람들이 우대곡까지 받았으니 장군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나도 눈굽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그때 마침 텔레비죤에서 방송원의 격동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자강도의 여러곳을 현지지도하시였습니다.》

《야! 장군님!》

예성이가 손벽을 치며 앞에 나앉았다. 온 식구가 숭엄한 감정에 휩싸이며 자세를 바로하고 텔레비죤화면에 눈길을 모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자강도안의 공장, 기업소들을 돌아보시는 장면이 펼쳐졌다.

첫순간 나의 가슴은 날카로운 그 무엇에 찔린듯 쿡 아파들어왔다. 나라와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걸머지시고 불철주야로 인민군부대들과 공장, 농촌을 찾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

어머니도 안해도 눈굽을 찍으며 흑 코물을 들이켰다.

오늘 화면으로 장군님의 모습을 뵈옵느라니 다시금 가슴을 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우리가 국가계획이나 수행했다고 해서 만족을 느낄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수 없다. 장군님께서 걸으시는 현지지도의 길, 전선길을 마음속으로 따라걸으며 장군님과 숨결도 생각도 감정도 함께 하는것이 장군님을 받드는 참다운 전사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쌀은 곧 사회주의다.

나의 머리속에는 해방후 토지를 분여받고 첫해농사를 지어서 선참으로 애국미를 싣고 장군님을 찾아갔던 김제원농민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어 전후 협동화를 하고 첫해농사를 지어 수백가마니의 쌀을 나라에 바쳤던 아버지세대의 생각도 떠올랐다.

보도가 끝난 후 나는 가족앞에서 분배받은 량곡의 일부를 덜어 나라에 바칠 결심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물론 안해도 기뻐서 찬동해나섰다.

《정말 잘 생각했다.

우리 장군님께서 인민들의 식량문제때문에 그리도 걱정하시는데 우리가 제 살림만 생각한다면 그건 도리가 아니다.

우리가 좀 덜 먹더래두 조금이나마 나라에 보탬을 하자꾸나.》

나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조회가 끝나 당비서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가 먼저 관리위원장실로 찾아왔다.

《위원장, 한가지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게 있어서 왔소.》

《뭔데요?》

나는 저으기 긴장해서 당비서를 마주보았다.

《이자 민영태부위원장이 나를 찾아왔더군. 그가 하는 말이 자기가 지금껏 나라앞에 농사군의 본분을 못하고 살아왔는데 그 죄를 다소나마 씻게 해달라는거요.》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그는 나라의 식량사정이 어려운 때에 차례진 식량을 그대로 먹을수가 없다고 하면서 절반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제기해왔소.》

《예?!》 나는 가슴치는 충격에 목이 메여 더 말을 못했다.

《위원장동문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전 부위원장동무의 결심이 정말 의로운것이라고 봅니다. 실은 저도 그 문제때문에 당비서동지를 찾아가려던 참이였습니다.》

나는 지난밤 가정에서 토의결정된 문제를 털어놓았다.

박정운비서는 뜨겁게 내 손을 마주잡았다.

《위원장! 어쩌면 위원장도 내 생각과 꼭같은가! 우리 집에서도 엊저녁 그런 론의가 있었네.》

《예?!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다시한번 놀라 격한 어조로 되물었다.

당비서의 주름진 얼굴에는 기꺼운 미소가 어려있었다.

《역시 우린 한마음한뜻이요. 일군들부터가 이렇게 생각이 같으니 아마 농장원들도 같은 심정일거요.》

그의 말은 옳았다.

아닐세라 이날 하루사이에만도 박영순반장과 한창세분조장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농장원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 소문이 날개달린듯 온 리에 퍼져 어느덧 농장원들이 너도나도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선봉리농장원들의 애국의 마음이 담긴 낟알가마니들이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였다.

나는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농사군으로서 응당 할일을 했을뿐인 우리들에게 어떤 영광이 차례지게 될지 미처 알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선봉리농장원들의 소행을 애국적소행으로 높이 평가하여 감사문을 보내주시고 주체의 최고성지 금수산기념궁전에 선봉리농장원들을 불러주시는 크나큰 영광을 베풀어주시였던것이다.

이제 새날의 아침이 오면 평양에서 보내준 뻐스들을 타고 온 선봉사람들이 꿈결에도 그리던 어버이수령님을 뵈오려 주체의 최고성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가게 된다.

받아안은 사랑에 미처 다 보답하기도 전에 행복과 영광을 또 받아안게 되니 끝없는 그 사랑에 보답할 날은 과연 언제란 말인가!


준석은 더이상 쓸수 없어 그만 펜을 놓았다.

어느덧 동창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밖에 나서니 맑고 시원한 새벽공기속에 구수하고 향긋한 흙냄새가 풍겨온다.

준석은 이슬덮인 고향의 대지를 걷고있었다.

발목이 시도록 걷고 또 걷고싶은 땅이다. 이 세상 만물에 생명의 자양을 주고 뿌리를 품안아 꽃을 피워주고 열매를 맺게 해주는 은혜로운 대지, 한알을 주면 백, 천으로 보답할줄 아는 땅…

파랗게 잎이 돋아난 밀보리포전에 이르자 준석은 문뜩 북받치는 감격을 느끼며 무릎을 꺾고앉았다. 그의 두손이 땅을 어루만진다.

부드러운 토양, 그 품에서 싹터오른 야들야들한 애기잎들…

이제 그 잎들이 자라 줄기와 아지를 뻗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바로 땅의 넋이다.

그렇다. 땅은 열매를 낳는다. 열매로써 자기의 넋을 새긴다.

준석은 분명 땅이 숨쉬는 소리를 듣고있었다.

새로운 열매를 배태하며 대지는 숨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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